여섯걸음의 거리감
W.닻별
내 자리에서 딱 여섯걸음
싸가지 없는 후배가 앉아 있는 그 자리까지 가는길이 나에게는 6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지옥의 시간이나 다름 없었다.
"얘는 왜 또 울상이야 누가 괴롭혔어?"
"아니"
"햄버거 안사줬냐 아니면 짜장면?"
"자꾸 사람 쪼잔하게 만들래?"
"야 야 김태형 무슨 일인데"
어제 들어온 알바비로 인해서 두둑해진 지갑을 쓰기위해 시끄러운 학생식당 앞까지 친히 발걸음을 옮겼더만
이미 여학우들의 관심을 독차지한 녀석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름이 뭐더라
남자 이름 알아서 뭐하냐 내가 점찍어뒀던 예쁜 후배들이 다 저녀석한테 가 있는데
"전정국인가 그랬지?"
"고놈 참 잘생겼네"
"잘생겼는데 예쁘장 해서 여자들한테 인기 많잖아"
"이제 외모 1순위 내줘야겠는데 과대님"
"닥쳐 새끼들아"
아무리 기분이 안좋아도 바보같이 헤헤 웃으면서 모진 소리라고 해봤자 바보 멍청이 밖에 못하던 김태형이 육두문자를 써가면서 인상을 쓴다면 말 다했지
기분이 더럽다 못해 건드리면 펑 터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내가 저 후배 이름은 기억 못해도 반반한 얼굴은 기억하지
지난번 일을 떠올리던 태형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드는지 베고 있던 친구녀석의 가방을 저멀리 던져버렸다.
"야! 저거 비싼거야 이새끼야!"
이제 어느정도 더위가 사그라들었나 싶었던 여름날의 끝자락
지친 몸을 이끌고 수많은 계단을 올라왔던 태형은 긴 셔츠를 걷어올리며 눈앞에 보이는 자판기 앞으로 냅다 뛰어들었다.
"더워 죽겠다 와 미쳤다"
급하게 천원짜리 지폐를 꺼내 밀어넣는 손과 기분나쁘게 턱을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는 손길이 다급했다.
몇 분을 기다려도 작동하지 않는 자판기를 어르고 달래며 발로 차기를 수십번 결국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던 와중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거기! 후배!"
우렁찬 태형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정국의 얼굴은 더운 여름날이 무색하게 땀 하나 흘리지 않은 채로 뽀송뽀송 하기까지 했다.
이름이...
연신 머리를 긁적거리던 태형이 얼른 와달라는 손짓을 하며 한번 더 흘러내린 땀을 훔쳐냈다.
"후배야 나 돈 좀 빌려줘"
"후배 아니고 전정국입니다"
"그래 정국아 천원만"
"지금 저한테 삥 뜯는거에요?"
"아니 그게 아니라 더워죽겠는데 돈이 없어 빌려주라 응?"
"없어요"
"큰 돈도 아니고 딱 천원이잖아"
"큰 돈도 아닌 천원이 없어서 자판기 음료수도 못 뽑아 먹는다는게 말이 돼요? 그럼 학교는 어떻게 오셨어요"
그늘도 아니고 햇빛 쨍쨍한 이런 곳에서 후배랑 실랑이나 벌이고 있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자판기를 걷어 찬 태형이 신경질을 부리며 자리를 떠버렸다.
영문도 모른채 태형이 짜증을 내는 모습을 봐야했던 정국은 고개를 저으며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도 천원짜리가 없는데 어떻게 뽑아달라는건지
같은 학교인건 알았는데 같은 과 후배인줄은 몰랐던 태형은 그 날 이후로 사사건건 마주치는 정국을 의식할 수 밖에 없었다.
정국만 보면 그 날 뽑지 못했던 음료수와 함께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던 모습이 떠올라 괜히 기분이 상했다.
자신이 1학년일때만 해도 동기와 선배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는데 신입생으로 저 잘생긴 얼굴을 가진 녀석이 들어오자마자
너나 할것없이 모든 여학우들의 관심을 빼앗은 것만 같아 배가 아팠다.
단지 혼자만의 열등감일지도 모를 이 감정을 자신이 느끼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과대표인 자신과 근로학생인 정국이 매번 학과에서 마주쳐야 한다는 사실 또한 말이다.
"조교님은요?"
"나한테 일 떠맡기고 놀러나가셨어"
"일을 맡겨요?"
"그래 뭐가 문제야"
"아니 뭐 오늘도 늦게 집에 가겠다 싶어서요"
"무슨 뜻이야?"
"별 뜻 없어요"
조교가 없다는것 쯤은 내가 조교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만 봐도 알텐데 꼭 한번씩 물음을 던지는 녀석의 태도가 아니꼬웠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저렇게 매번 틱틱 대는 태도야
"오늘 모임인건 알지?"
"무슨 모임이요"
"원래 학과 애들끼리 모이는건데 너도 보고싶다고 데려오래"
"저 술 잘 못해요"
"원래 선배가 말하면 못마셔도 간다고 하는게 예의야"
"그런 예의 배운적 없어요"
"아 그러냐 나는 선배한테 맞으면서까지 배워서"
대화는 거기까지가 끝이였다.
서로의 자존심은 박박 긁어놓고 언제나 끝마무리는 무시였다.
정국의 무시로 인해 태형이 혼자 씩씩거리는 익숙한 레파토리가 그들 사이에 존재했고
갑작스럽게 불타올라 싸우기 시작한 처음과 다르게 아예 없던 사람처럼 구는 마지막이 남들이 보기엔 우스울 정도였다.
두 사람이 싸우는 장면을 목격한게 한 둘이 아니라 툭하면 마주치는 그들 사이에 운명이 있다는둥 장난으로 시작한 아이들의 소문이
점차 크기를 부풀려 과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는걸 그 둘만 모르고 있었다.
모르는게 약이라는 어른들 말이 어느정도 맞는 소리였다.
시끌벅적한 술자리
정국이 제일 싫어하는 자리였다.
하하호호 웃으면서 술을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모든것들이 술이라는 이름 하나로 허용범위가 넓어지는게 싫었다.
지금도 쩔쩔 매고 있는 여자후배 하나를 옆에 끼고 술을 퍼마시는 질 안좋은 선배의 모습에 눈쌀이 찌푸려졌다.
"우리 잘생긴 후배~ 잔 받아야지"
"아 감사합니다"
지나치게 달라붙어서 애교를 떨고 있는 이 선배도 싫다.
제일 싫은건 자신을 이런 자리로 부른 김태형이란 저 선배지
데려온건 자기면서 정작 자신은 나몰라라 술이나 퍼마시고 있고 헬렐레 하면서 남이 주는 술은 모두 다 들이붓고 있으니 조만간 픽 쓰러질게 분명했다.
정국이 생각을 끝마침과 동시에 큰 소리를 내며 상 위로 엎어진 태형이였다.
"이 자식은 매번 나오는데도 술이 이렇게 약하냐"
"원래 잘 못먹잖아요"
"에이 술 맛 떨어지게 누가 이 녀석 좀 치워"
"너무하다 선배"
"제가...데려갈게요!"
저 선배 같지도 않은 선배 마저도 없으면 이 어색한 공간에서 어떻게 버텨
재빨리 쓰러진 태형을 부축해서 들어올린 정국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술자리를 벗어났다.
"쟤네 둘이 요즘 묘하다?"
"사귀나? 그럼 집도 알겠네 냅둬요"
정국의 행동으로 인해 오해는 한층 더 깊어져가고 있었다.
"선배 집 좀 알려주세요"
"뭐야"
"선배 집..집이요"
"나 안갈래 시어"
"네?"
"가기 시타고!"
거의 질질 끌다시피 힘겹게 태형을 옮기고 있었는데 눈 앞에 보이는 전봇대로 달려가더니 꼭 붙잡고 얼굴을 부비적 대기 시작했다.
"뭐래 선배 취했어요?"
"태형이 시타 안간다 시타!!"
"이런 미친..."
"가기 시타는데 왜그르냐!"
"또라이가...조용히 해요!"
"읍부으부!!"
"야! 김태형!"
하나둘씩 몰리는 시선에 주위를 살피던 정국이 거친 손길로 태형의 입을 틀어막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그런 정국의 목소리에 놀란건지 입을 꾹 다문 태형이 조심스레 막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ㅇ...왜"
"집 어디야"
"저 앞"
"앞장서"
"네 가게스미다"
아직도 다 깨지못한 술로 인해 어눌한 발음으로 행선지를 내뱉더니
비틀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한 태형을 바라보던 정국이 긴 한숨을 내뱉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잘 걷는가 싶더니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려 하지를 않나 쓰레기통과 대화를 하지를 않나
분명 30분 거리였는데 어느새 한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간이 야속했다.
"선배 집이에요"
"하 모야 후배 왜 여기냐"
"술 취해서 데려다 줬잖아요 침대도 혼자 못가요?"
"어 나 약간 어질하구 그르네?"
"아 진짜 선배만 아니면 한대..."
정말 순수한 아이처럼 헤헤 하고 웃어버리는 태형의 얼굴을 마주하자 찬 거실 바닥에 던져두고 갈 수가 없어서
낑낑 거리며 방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자신도 그 옆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으니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킨 태형이 순식간에 옷을 잡아끌어 두 팔안에 정국을 가둬냈다.
"무..뭐야"
"후배야"
"선배 취했죠 비켜요"
"이름 알려줘"
"아니 여태까지 제 이름도"
이름을 물어봐놓고 대뜸 입술을 맞대는건 어느 나라 질문법이에요
아까까지 쐬었던 바깥바람 때문인지 까슬해진 입술이 닿아 저절로 찌푸려진 정국의 얼굴을 보지 못했는지
천천히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아대는 모습이 집요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더운 입김이 맞닿은 입안으로 퍼지고 어느샌가 입안을 배회하고 있는 혀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감싸지도 않은채
멍하니 눈앞에 놓여있는 태형의 속눈썹을 보며 참 길다고 생각하는 정국이였다.
몇번 더 혀가 오가고 나서야 입을 떼어낸 탓에 축축해진 입주변으로 서서히 열이 오르고 있었다.
"미안해 이름 알려줘"
"전...정국이요"
"정국아 나랑 하자"
이건 순전히 술기운 탓이다.
나도 이미 몇 잔은 들이켰고 이 선배도 취해있고 무엇보다 이렇게 잘생긴 얼굴이 코앞에 놓여있는데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느새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태형의 두 손위로 자신의 손을 포갠 정국이 눈을 감자
그의 얼굴 위로 몇 번이고 입을 맞추는 태형이 그날따라 유난히 다정하게 느껴졌다.
어제는 또 몇 잔에 뻗어버린거며 누구와 뜨거운 하룻밤을 보냈고 어째서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걸까
밤새 누군가를 끌어안고 허리를 움직이며 자신의 것을 열심히 쓴 것 같은데 기억이 깨끗하게 날아가버렸다.
"아...머리아파"
메모라던가 옷이라던가 뭐 하나 흔적이 남아야 하는데 꿈이라도 꾼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정리정돈이 잘 되어있었다.
싫다던 후배 녀석을 끌고 가 술자리에 참석하게 한거랑 졸업한 선배들 술을 한잔 두잔 받아마신게 기억나긴 하는데...싫다던 후배...후배녀석...
"김태형 이 미친놈아!"
죄없는 이불을 걷어차내던 태형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믿고싶지 않은 현실에 경악을 하며 급하게 옷가지를 주워 입었다.
지난 밤 자신을 데려다준 그 후배녀석에게 진지한 얼굴로 하자고 말한것까지 기억나면 거의 전부다 아니야?
강의 시작까지는 여유로웠지만 복잡해진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정국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준비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후배야!"
분명히 자신과 눈이 마주쳤는데 아무일도 없었단 듯이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모습에 기가 차는 태형이였다.
아무리 그렇고 그런 일이 있어도 그렇지 지나가는 개만도 못한 대우라니 씩씩 거리며 달려가는 그의 모습을 발견한 정국이 재빠르게 도망가기 시작했다.
"야 후배! 거기안서?!"
"그만 좀 따라와요!"
건장한 남자 둘이서 대낮의 술래잡기를 하고 있으니 너도 나도 수근거리기 바쁜 와중에
자신들의 과대표와 근로학생이란걸 안 과 사람들은 조용히 자신의 할 일을 할 정도로 이미 유명인사인 둘이였다.
잡았다 생각했는데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큰 그림자 때문에 멈춰 선 태형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과대표가 수업 시작 했는데 여기서 뭐하는걸까?"
"조...조교님?"
"그래 여기서 뭐해?"
"지금 들어가려구 했죠! 조교님도 참!"
"얼른 들어가"
"네 살펴가세요"
다 잡은거였는데 어디로 사라졌지
자신을 왜 피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태형은 간지러운 귀만 긁적거리며 강의실을 찾아갔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까 요근래 자신과 마주치기만 하면 피하는 정국의 태도에 여러모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술버릇이 안좋은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런 일이 있을때마다 좋게 해결보고
어차피 정황상 끝까지 안갔을 테니까 마음 놓고 있었던 자신의 실수가 컸다.
아직도 그 일만 떠올리면 자신의 밑에서 신음을 뱉던 이름 모를 후배가 생각나니 말 다했다.
학과 안에서는 서로 일처리 하느라 바빠 말을 걸지도 못하고 다른 일을 핑계로 말이라도 걸라 치면 녀석이 자리를 뜨기 바빴다.
쌓이고 쌓인 울화통이 터지기 직전인데 일을 해결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 했다고 영화에서 나온 괴물 보듯 피하냐 이거지
"후배"
"왜요"
"끝나고 나 좀 봐"
"제가 왜요"
"시간 좀 내"
"싫어요"
"너 그 때 술 먹고 우리집가서"
"알았으니까 조용히 해요"
"니가 더 시끄럽다"
"너네 둘 다 시끄러워 여기 학과 사무실인거 몰라?"
기어이 조교에게 한 소리를 듣고 나서야 둘의 실랑이가 끝이났다.
정국이 자신을 피한 이후로 이런 말싸움은 오랜만이라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서서히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가린 태형이 몇 번 헛기침을 하고는 무덤덤한 얼굴로 정국을 바라봤다.
잘생겼는데 싸가지가 없지
말은 또 얼마나 틱틱 거리면서 하는지 누가 보면 시비거는줄 알테고
근데 또 우는건 예쁘기는 하던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날의 일이 클로즈업 되면서 세차게 뛰어대는 심장에 달아오르는 얼굴까지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책상에 이마를 들이받은 태형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용건이 뭐에요"
"그 날 있잖아"
"무슨 날이요"
"그 우리 술먹은날"
"...그 날이 왜요"
"우리...잤지?"
"제가 선배 데려다주고 나왔잖아요 기억 안나요?"
"아니야 분명히 잤어"
"당사자가 아니라는데 왜그래요"
"내 머리가 그렇다고 하는데 넌 왜그래?"
"술먹고 뻗어서 쓰레기통이랑 얘기하는 선배가 믿음직해요 제가 믿음직해요?"
"어...그건 너야"
"그러니까 그 날 아무일도 없었고 저는 선배 데려다주고 집에 갔어요"
"후배야 그럼 머릿속에서 하응 하앙 거리면서 내 밑에서 깔려 우는 네 모습은 뭐야?"
"이 미친새끼가! 누가 언제 하응 하앙 거렸어! 아파서 숨넘어가는 와중에 그런 소리를 어떻게 내!"
"아팠어?"
"그럼 처음하는데 안아파요? 잘하는 것도 아니고 무식하게 쳐박는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를 푹 숙인 정국이 자신의 주먹을 꽉 쥐어내며 울음을 참아냈다.
어차피 저 선배는 술먹고 벌인 일이고 자신만 조용히 하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을거라 생각해서 안울려고 했는데 모든게 다 틀어져버렸다.
"ㅇ..야 후배야 울어? 우는거야?"
"후배 아니고 전정국이요 몇 번을 말해요"
"아니..정국아 진짜 미안해 나도 처음이야 남자는"
어쩔줄 몰라하면서 어정쩡하게 허공에 손을 뻗고 있는걸 코앞에서 보고 있자니 나오던 눈물이 쏙 들어가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눈물을 닦아낸 정국이 정말로 미안하다고 연신 머리를 숙여대며 죽을죄를 졌다고 말하는 태형을 보고 괜찮다는 말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니까 형도 그냥 잊어요"
"아니 그건 그거대로 미안하고 이건 이거대로 미안해"
"뭔 소리에요"
"기억이 가물가물 해서 그런데 한번 더 할래?"
"...미친새끼"
"이번에 제대로 차였나봐 이야 누군지 상처 하나 기깔나게 만들었네"
"이번에도 여자 문제냐"
"아니..."
"그럼 뭐야"
"남자"
"남자?!..그래 남자 그럴 수도 있지"
"뭐라고 했는데"
"하자고 해서"
"사귀냐?"
"아니"
"야 아무리 그래도 초면에 그러면 주먹 날릴만 했네"
"맞아 고백이 먼저지"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말던 뭐가 문제인지 다시 한번 짚어보던 태형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뭐야 왜 뭐"
"네 말이 맞아"
"뭔데 새끼야 무섭게"
"고맙다 친구야! 역시 우정이란!"
"쟤 한대 맞고 어디 이상해진거 아냐?"
"몰라 나 소름 돋았어"
정국이 있을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뛰었다녔던 탓인지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어댔다.
마지막으로 가봐야 하는 곳에는 꼭 정국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복도를 가로질러 가는 그를 발견했다.
"정국아!"
"네?"
처음이였다.
후배가 아닌 정국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준 것이
어디가 그렇게 맘에 들지 않는지 자기만 보면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태형이 저렇게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자신을 마주한게
"선배?..."
"일단 미안해 근데 하자는건 진심이였어"
"진짜 이자식이..."
"내 말 좀 들어봐!"
"뭔데요"
"그러니까 내가 있잖아"
평소와 다르게 뜸을 들이는 그의 모습이 어색했다.
자꾸만 우물쭈물 대면서 손가락을 비비적 거리더니 머리를 긁적이고는 괜히 목소리를 가다듬고 여러모로 이상한 광경이였다.
"좋아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어버린 둘 사이에 조용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햇빛이 반사 되어 정국의 표정을 정확히 볼 수가 없어서 안절부절 못하던 태형이 이내 한발자국 걸음을 내딛어 계단 한칸을 내려왔다.
"정국아 내가 그쪽으로 가도 될까"
"안된다고 해도 올꺼잖아요 얼른와요"
정국이에게 닿기까지 딱 여섯칸이 남은 계단이였다.
학과 사무실에서도 너와 나의 거리는 딱 여섯걸음이였는데 한 발 한 발 내딛는 여섯걸음이 그때만큼 지옥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꺼번에 2칸씩 계단을 뛰어내려간 태형이 정국을 품에 안았다.
여섯걸음의 거리감이 이제는 코앞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