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피트의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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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그리스신화에서 등장하던 사랑의 결실을 맺어준다는 큐피트가 현실에도 존재했다면 아마 멍청하다못해 미련한 놈이지 않을까 싶다.

내 큐피트가 실수로 저녀석한테 화살을 쏜건 아닐까

무뚝뚝하고 조용하고 얼굴만 반반한 저 후배녀석에게 말이다.

 

 

 

 

 

 

 

 

"윤기형! 여기요!"

 

 

 

 

 

 

 

 

시끄러운 비글 한마리, 그나마 조용한 비글 한마리를 각각 양 사이드에 끼고서 밥을 먹고 있던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시선이 몇초간 서로에게 머물러 있다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밥을 퍼먹는 동그란 정수리를 보며 입술을 씹어댔다.
녀석의 얼굴에 떠오르는 저 표정을 볼때마다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렇게 크게 안불러도 알아들어"

 

 

 

 

"오늘 소세지볶음 진짜 맛있어요"

 

 

 

 

"너나 많이 먹어"

 

 

 

 

 

 

 

 

동문서답이 주특기인 김태형답게 소세지볶음 찬양이나하고 앉아있는 모습이 22살이 아니라 2학년 2반 초등학생 같았다.
분명히 머리로는 김태형이나 박지민 앞에 앉아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몸이 지멋대로 전정국 앞에 자리를 잡은 탓에 쉬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묵묵히 밥을 먹고 있던 정국의 시선이 젓가락으로 반찬들을 뒤적거리고 있는 윤기의 식판으로 향했다.
툭하면 사소한걸로 옥신각신하는 비글 두마리를 구경하던 윤기가 열심히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자신의 식판을 뚫어지게 보고있는 정국이를 발견했다.

 

 

 

 

 

 

 

 

"먹을래?"

 

 

 

 

 

 

 

 

언제 다 먹은건지 식판 가운데가 비어있었다.
소세지 볶음이 놓여있던 자리 같은데...자신의 식판에 놓여있던 소세지 하나를 집어들어 내밀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정국이 자연스레 입으로 받아먹었다.
놀란 윤기의 표정을 본 정국이 자신이 무의식중에 한 행동을 알아차리고는 굳은 표정으로 우물거리던 입을 멈췄다.

보통 건네주면 젓가락이나 숟가락으로 가져가 먹는게 당연한거 아닌가?

아기새가 모이를 받아먹듯 바로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이 윤기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갑자기 벌떡 일어선 정국이 말없이 식판을 집어들어 식판 수거대로 가져다 놓고는 재빠르게 학생식당을 빠져나갔다.

 

 

 

 

 

 

 

 

"야! 꾹아 어디가!"

 

 

 

 

"정국아! 나 아직 다 안먹었는데, 형 저희 먼저 가볼게요!"

 

 

 

 

 

 

 

 

한참을 투닥거리다가 뒤늦게 정국이가 나가는 뒷모습을 확인한 태형과 지민이 헐레벌떡 뒤를 쫓았다.
남겨진 윤기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시발...귀여워"

 

 

 

 

 

 

 

 

 

 

 

 

 

 

 

 

 

 

 

 

 

 

 

 

 

 

 

 

 

전공수업은 그렇다쳐도 교양수업은 다른 학과랑 같이 듣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생판 모르는 얼굴들이 가득한 수업을 듣는것이 일반적이였다.
이제 지긋지긋한 교양수업도 이번학기가 마지막이였고 자신이 나름대로 흥미를 느끼는 과목이였기에 기분좋게 강의실문을 열고 들어선 윤기였다.
아직 수업시간까지 널널하게 남은 탓인지 빈자리가 가득했고 교수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강의내용은 잘 보일만한 좋은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창가쪽을 훑어보고 있었는데 익숙한 정수리가 눈에 띄였다.

 

 

 

 

 

 

 

 

"전정국이다"

 

 

 

 

 

 

 

 

이제 동그란 정수리만 봐도 그녀석인걸 알 정도가 된 자신이 웃기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낮게 읊조린 윤기가 지체없이 걸음을 옮겼다.
비어있는 옆자리에 가방을 올려놓자 흠칫한 정국이가 누군가하고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전정국 너 이 수업듣냐"

 

 

 

 

"네"

 

 

 

 

 

 

 

 

언제나 시선도 맞추지 않고 내뱉는 저 단답이 사람 속을 뒤집어놨다.
무심한 표정, 할말 없게 만드는 대답, 돌아가버린 고개 이 쓰리콤보를 겪는 날에는 하루종일 답답한 가슴앓이를 해야했던 윤기였다.
이젠 그마저도 익숙해지려고 하니 사랑을 하는게 아니라 체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모순적인 하루 하루에 어떤 돌파구를 찾아야할지 막막했다.

큐피트 이새끼는 좋아하게 만들었으면 상대방을 어떻게 꼬셔야 하는지 알려주기라도 하던가 아니면 전정국 가슴에 화살이라도 쏘던가 해야지

 

 

 

 

 

 

 

 

"너도 이 과목에 관심있었어?"

 

 

 

 

"예전부터 좋아했어요"

 

 

 

 

 

 

 

 

순간 앞뒤 상황 다 자르고 좋아했다는 말만 들었으면 고백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안그래도 흰 피부 탓에 붉어지면 금새 티가나는 윤기였기에 '아, 그렇구나' 대충 얼버무린 후 졸린 척 팔에 고개를 파묻고 엎드릴 수 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내가 할말이 없게 만들었지만 24살이나 되서는 짝사랑 상대를 눈앞에 두고 수줍어 한다는게 자기자신이 느끼기에는 한없이 부끄러운 일이였다.
좋아한다는 마음이란게 굳이 입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과를 위하여~!"

 

 

 

 

"위하여!"

 

 

 

 

 

 

 

 

윤기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과모임이였다.
그냥 오순도순 모여서 회의하고 밥먹는거면 괜찮은데 꼭 호프집을 장소로 정해서 술을 퍼마신다는게 맘에 들지 않았다.
물론 술을 마시는것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였다, 다만 술자리를 빌미로 짓궂은 장난을 치거나

후배를 꼬신다던가 하는 그런식의 수법이 비일비지하니까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우리 게임하자 게임"

 

 

 

 

"**이가 좋아하는 랜덤게임~ 무슨게임~ 게임 스타트!"

 

 

 

 

"눈치게임 1!"

 

 

 

 

"2!"

 

 

 

 

 

 

 

조용히 술 좀 마시려고 했더니 게임을 하자는 말이 나오자 시끄러워진 테이블에 인상을 찌푸리던 윤기가

일찍 끝내버리겠다는 생각으로 5를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맞은편에 앉아있던 정국이도 같이 몸을 일으켰다.

전정국이랑 같이 일어났다, 통한건가

 

 

 

 

 

 

 

 

"오오~! 민윤기랑 정국이 러브샷 가자 러브샷"

 

 

 

 

"남자끼리 뭔 러브샷이야"

 

 

 

 

"야! 우리과 대부분이 남자거든? 재미없게 이럴래?"

 

 

 

 

 

 

 

 

얼른 하라고 부추기는 목소리가 하나 둘 커져가고 당황한 표정을 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정국이를 보며 짝사랑 상대랑 러브샷이라니

좋아해야 될 일인지 곤란해야 할 일인지 알 수 없는 윤기가 걸음을 옮겼다.
서로 마주보는 상태가 되자 평소에도 큰 눈이 몇 배는 더 커져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정국이의 얼굴 탓에 이상한 기분이 드는 윤기였다.

어차피 끌어안고 술만 마시면 되는건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는건지

술잔을 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오는게 행여나 누가 볼까 급하게 정국이 뒷목으로 팔을 감싸며 속삭였다.

 

 

 

 

 

 

 

 

"얼른 하고 끝내자 잔 들어"

 

 

 

 

 

 

 

 

살짝 떨려오는 목소리를 알아챘을까
정국이의 표정이 어떤지 보고싶었지만 거의 끌어안는듯한 자세에 보이는거라곤 고르게 자리잡은 귀와 곧게 뻗은 목덜미뿐이였다.
이 자식은 귀도 잘생겼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뒷목을 감싸오는 정국이의 손길에 망설임 없이 잔을 들이켰다.
몇초도 안걸렸을 그 시간만 늘어난 테이프처럼 천천히 스쳐지나가는 느낌에 쓰디 쓴 술맛이 배로 느껴졌다.

전정국 귀 빨개졌네

 

 

 

 

 

 

 

 

 

 

 

 

 

 

 

 

 

 

 

 

 

 

 

 

 

 

 

 

 

 

같은 교양수업을 들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종강이라니 하늘이 무심하다는 생각을 하며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못내 아쉬운 윤기였다.
유일하게 정국이를 독점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졸음이 쏟아질 것 같은 교수님의 수업도 열심히 들을 수 있었고

가끔 잠을 못이기고 꾸벅꾸벅 조는 정국이를 몰래 구경하면서 만족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였다.
종강이란 단어가 들려오자 이제 곧 방학이라는 것과 이 녀석 없는 몇개월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오늘 이 수업 종강이잖아 기분 좋냐"

 

 

 

 

"네 방학이니까"

 

 

 

 

 

 

 

 

방학이니까 들떠있을줄 알았는데 묘하게 가라앉은 얼굴하며 약간의 뜸을 들이면서 말하는 것도 그렇고 기분이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너도 기분 안좋냐 나도 기분 안좋은데 너 못보니까

속으로는 얼마든지 떠벌릴 수 있는 말을 곱씹으며 출석체크를 하시는 교수님의 부름에 애써 담담한척 크게 대답했다.
다른 수업때보다 훨씬 더 집중력이 흐트러져 있었다.
옆에 있는 전정국 또한 그런것인지 아까부터 공책에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이고 지우고 반복하고 있었다.
내용이 궁금해서 조금이라도 정국이 쪽으로 몸을 기울이려고 하면

거의 엎드리다싶이 고개를 숙이고는 철벽방어를 하는 탓에 무얼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뭐해'라고 적은 종이쪽지를 슬쩍 건네자 펴보고는 종이를 뒤집어서 적어내렸다.
사각거리는 연필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게 침울했던 기분이 서서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중 고등학교때나 하던 쪽지 주고받기를 대학교와서 할줄이야
전정국은 나를 유치하게 만드는 신비한 재주가 있는게 아닐까

그 작은 종이에 쓸게 얼마나 많다고 아까부터 숙여있던 고개가 들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속 썼다 지우는 통에 너덜너덜해진 종이쪽지가 손위에 놓여졌고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선배 생각이요'

 

 

 

 

잘못 쓴건가 싶어 몇번이고 들여다 보아도 정갈한 글씨체로 써져 있는 것은 선배 생각이요 였다.
정국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교수님을 쳐다보면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아니, 귀 끝이 빨개진거 보면 아무렇지 않은건 아닌가보다.

 

 

 

 

 

 

 

 

 

 

 

 

 

 

 

 

 

 

 

 

 

 

 

 

 

 

 

 

 

 

"날씨 너무 덥다"

 

 

 

 

"죽기 좋은 날씨야"

 

 

 

 

"형 아이스크림 사줘요"

 

 

 

 

"네가 사다먹어"

 

 

 

 

"와 진짜 이러기야"

 

 

 

 

 

 

 

 

종이쪽지가 원인이라면 결과는 성공적인 고백이였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녀석을 끌고 나가 대뜸 예전부터 너 좋아했어 그러니까 사귀자 강요하는건 아냐 거절할꺼면 거절해 라고 속사포로 쏟아붓자

어버버 거리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생각해보니까 너 진짜 바보같았다"

 

 

 

 

"뭐요?"

 

 

 

 

"고백 받으니까 당황해서는"

 

 

 

 

"그때 얘기 안하기로 했잖아요"

 

 

 

 

"귀여워서"

 

 

 

 

"닥쳐요"

 

 

 

 

"애인한테 닥쳐요가 뭐야 임마"

 

 

 

 

"애인한테 임마가 뭐에요 임마가"

 

 

 

 

 

 

 

 

투닥거리더니 더운 날씨 탓인지 다시 늘어진 정국이를 보며 가지고 있던 부채로 부채질을 해주던 윤기가 말을 이어나갔다.

 

 

 

 

 

 

 

 

"난 처음에 무뚝뚝하고 조용하던 네가 왜 좋아진지 몰라서"

 

 

 

 

"네"

 

 

 

 

"현실에도 큐피트가 있다면 그 새끼가 실수로 화살을 잘못 맞춘 줄 알았을 정도로 어이가 없었어"

 

 

 

 

"그게 뭐에요"

 

 

 

 

"그냥 그랬다고 비웃냐"

 

 

 

 

 

 

 

 

뜬금없는 윤기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던 정국이가 손에 든 부채를 빼앗아 윤기한테 부채질을 해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그거 실수 아니에요"

 

 

 

 

"뭐가"

 

 

 

 

"제가 매일 좋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니까 실수 아니라 정확히 맞춘거에요"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리는 정국이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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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안의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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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언제쯤이면 저 별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까요?"

 

 

 

 

 

 

 

 

아주 먼 미래, 적어도 몇 십년이 흐른 후였으면 좋겠어 정국아

 

 

 

 

 

 

 

 

"언젠가는 볼 수 있지 않을까"

 

 

 

 

 

 

 

 

 

 

 

 

 

 

 

 

 

 

 

 

 

 

 

 

 

 

 

 

 

 

시끄러운 클락션 소리가 귓가를 울려댔다.
차들이 뿜어내는 매캐한 연기가 깊게 들이마신 숨과 함께 밀려들어와 저절로 기침이 새어나오게 만들었고 높디 높은 빌딩에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얼른 이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더욱 더 속도를 내어 달렸다.

 

 

 

 

 

 

 

 

"오늘도 오셨네요"

 

 

 

 

"네, 매번 잘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마 조용하고 공기 맑은 서울 외곽에 위치한 큰 병원 안을 들어설때마다

목에 꽉 매여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내고 격식있게 차려입느라 단정하게 정돈한 머리도 맘에 들지 않아 몇번이고 헝클어트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자유분방하게 살기를 원했던 내가 매일 아침마다 정장을 차려입고 머리를 매만지며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대기업으로 출근을 하는 이유는 오로지 사랑하는 나의 연인 때문이였다.
억지로 물려받은 이사라는 직책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하루종일 사무실 의자에 앉아 머리를 굴려가며 계획서를 짜내고 자잘한 계약건, 승인서 등과 같은

빽빽한 용지에 싸인을 하는 일을 묵묵히 해내는건 일주일 중 단 이틀뿐이지만 힘들었던 5일을 잊게 만들기엔 충분한 달디 단 보상을 받기 위해서였다.

 

 

 

 

 

 

 

 

"정국아 형 왔어"

 

 

 

 

"역시 형이구나"

 

 

 

 

"이번에도 발걸음 소리만 듣고 안거야?"

 

 

 

 

"네 구두소리가 들렸어요"

 

 

 

 

"역시 우리애인은 달라도 뭔가 다르네"

 

 

 

 

 

 

 

 

수많은 환자들이 생활하는 병실들을 지나쳐 복도 끝에 놓여진 호화스러운 1인용 병실문을 열고 들어서면

새하얀 병원복을 입고있는 내 연인이 맑은 웃음을 지으면서 나를 반겨준다.
정국이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는 내가 없었던 5일동안 어떻게 생활했는지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신나서 떠드는 목소리를 듣는 이 순간이 찾아올때마다

진정한 주말을 맞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도 고생했어요 형"

 

 

 

 

 

 

 

 

가볍게 머리를 매만져주는 손길에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머리를 부비적 대다가 고개를 들어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산책 나갈까? 요즘 날씨도 좋던데"

 

 

 

 

 

 

 

 

고개를 끄덕이는 정국이를 익숙하게 안아들고는 휠체어에 앉혔다.
더운 날씨인만큼 얇은 담요를 덮어주고 휠체어를 밀고 병실 밖을 나서는 태형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씁쓸해보였다.

 

 

 

 

 

 

 

 

 

 

 

 

 

 

 

 

 

 

 

 

 

 

 

 

 

 

 

 

 

 

정국이가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지 올해로 3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3년 전, 여느때와 다름없이 태형이와의 만남을 위해 길을 나서던 정국이를 들이받은건 부모님차를 몰래 타고 여행을 떠나려던 고등학생 무리들이였다.
무면허로 운전을 했던 탓에 미숙한 핸들조절과 신나게 웃고 떠들면서 난잡해진 차안이 문제였던 것이였다.
마주오는 차량을 피하기 위해 급하게 핸들을 꺾었는데 때마침 신호를 기다리던 정국이를 그대로 치고

가로등에 부딪혀 안에 타고 있던 고등학생들도 큰 부상을 입었었다.
곧바로 응급실로 실려간 정국이는 의료진의 빠른 대처로 목숨은 건졌지만 하반신 마비라는 판정을 받았다.
급하게 연락을 받고 달려간 태형이는 새근거리며 잠들어있는 정국이의 모습을 보고 안도했지만

이내 자신을 불러내 뜸을 들이는 의사의 태도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저..전정국씨 보호자분"

 

 

 

 

"네 제가 보호자에요"

 

 

 

 

"정국씨가 신경손상으로 하반신 마비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네?..."

 

 

 

 

 

 

 

 

하반신 마비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저렇게 만든 새끼들 어딨냐면서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리는 탓에 간호사와 의사까지 태형이를 말리려고 애를 썼었다.
어느정도 진정을 한 태형이가 누워있는 정국이의 손을 잡으면서 차라리 자신이 이런 일을 겪었어야 했다면서 나지막이 울부짖었다.

 

 

 

 

 

 

 

 

 

 

 

 

 

 

 

 

 

 

 

 

 

 

 

 

 

 

 

 

 

 

정국이는 전국대회를 목표로 하는 유망한 육상선수였다.
태형이가 정국이한테 첫눈에 반한날도 정국이가 열심히 트랙을 달리던 날이였다.
그날도 지금처럼 무더운 날이 지속되는 여름의 한가운데였다.

 

 

 

 

 

 

 

 

"이제 뭐해먹고 살지"

 

 

 

 

 

 

 

 

대기업 회장의 아들치고는 후줄근한 옷을 걸쳐입고는 아이스크림 막대를 입에 물고 먹고 살 걱정을 하는 태형이 앞으로

단체로 훈련을 나온 것인지 맞춰입은 체육복을 입고 달려가는 무리들이 지나갔다.

이 더운 날씨에 어떻게 저렇게 뛰어

자신이 뛰는 것도 아닌데 질색한 표정을 하고 지나가는 학생들을 쳐다보던 태형이 한순간 정국이와 눈이 마주쳤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고 콧대를 따라 흐르던 땀방울이 턱선을 지나 목까지 흘러내리는 모습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남자치고는 큰 눈과 예쁘장한 얼굴이 무리들이 지나간 후에도 한참이나 태형을 그 자리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멀어져가는 정국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예쁘다 중얼거리고는 그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같은 시간대에 그 자리에 나와 정국이의 뛰는 모습을 구경했다.
처음에는 마주치기만 했던 것이 서로 고개 숙여 가벼운 인사도 하고 나중에는 번호도 교환하고 그렇게 순조롭게 연애라는 단계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종종 태형이와 얘기를 나눌때면 들뜬 얼굴로 자신의 미래에 대해 들려주던 정국이였다.

 

 

 

 

 

 

 

 

"저는 나중에 세계대회도 노려볼꺼에요, 달리는게 너무 좋아요"

 

 

 

 

"달리다보면 옆구리도 아프고 힘들지 않아?"

 

 

 

 

"그 느낌이 좋아요 숨이 차서 옆구리가 아프고 땀을 비 오듯 쏟고나면 아, 내가 살아있구나 하고 느껴요"

 

 

 

 

 

 

 

 

그런 자신의 연인이 하반신 마비라니 믿고 싶지도 믿을 수도 없는 꿈 같은 이야기였다.

 

 

 

 

 

 

 

 

 

 

 

 

 

 

 

 

 

 

 

 

 

 

 

 

 

 

 

 

 

 

깨어난 정국이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형 저 진짜 죽는줄 알았어요 차가 막 달려오는데 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태형이 모습에 반쯤 몸을 일으켜 인사를 나누고는 당시 상황에 대해 얘기를 하던 정국이가

평소와 다르게 어두운 낯을 띄고 있는 태형이의 얼굴에 의아함을 느꼈다.

 

 

 

 

 

 

 

 

"목마르다 저 물 좀 마시고 올게요"

 

 

 

 

"아니! 정국아 내가 줄...게"

 

 

 

 

 

 

 

 

태형이가 말릴새도 없이 이불을 걷어내고는 움직이려던 정국이가 들리지 않는 하반신에 힘껏 힘을 주었지만 미동도 없이 가만히 놓여져 있는 두 다리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태형이와 제 다리를 번갈아가면서 쳐다보았다.

 

 

 

 

 

 

 

 

"형 이거 왜 이래요? 이상하다 왜이래"

 

 

 

 

"..."

 

 

 

 

"여기 뭐 올려놨...아니, 마취한거에요? 왜 안움직이지"

 

 

 

 

"..."

 

 

 

 

"형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제발요 네? 태형이형"

 

 

 

 

 

 

 

 

애써 부정하고 싶은 현실에 밝게 말하던 정국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태형이를 보자

울컥하고 올라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형 저 다리 못쓰는거에요? 그런거에요?"

 

 

 

 

"정국아..."

 

 

 

 

 

 

 

 

태형이의 부름도 소용없는지 혼자서 중얼거리던 정국이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면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런 정국이 모습에 가슴이 아파오는 태형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우는 정국이를 끌어안아 다독이는 것 밖에는 없었다.

 

 

 

 

 

 

 

 

"형..저 이제 어떻게 살아요"

 

 

 

 

"나 있잖아 정국아 제발"

 

 

 

 

 

 

 

 

이제 자신이 좋아하던 달리기도 세계대회에 나가겠다는 꿈도 모든게 산산히 부서진 정국이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연인 태형뿐이였다.

 

 

 

 

 

 

 

 

 

 

 

 

 

 

 

 

 

 

 

 

 

 

 

 

 

 

 

 

 

 

"정국이 지금 어디있어요?"

 

 

 

 

 

 

 

 

전화를 받자마자 급하게 달려온 태형이가 안내데스크에 묻자 병실안에 있다는 간호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빠르게 병실로 달려가 문을 열어젖혔다.
새하얀 침대에 누워서 형 왔어요? 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정국이한테로 다가가 두 어깨를 잡아 시선을 맞췄다.

 

 

 

 

 

 

 

 

"정국아 너"

 

 

 

 

"응 왜 불러요"

 

 

 

 

 

 

 

 

더 뭐라고 말을 해야되는데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에 깊은 한숨만 내뱉고는 시선을 내리는 태형이였다.
손목에 감겨진 하얀붕대를 보자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실에 누워있던 그 날이 생각나 가슴이 아려왔다.
몇달간은 병원에서 지내야한다는 의사의 말에 앞으로 내야할 병원비와 여러가지 필요한 돈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사자리에 앉은 이상

회사가 굴러갈 수 있도록 일을 해야했기에 정국이를 방치해둔 제 잘못이 컸다.
열심히 업무를 하는 도중에 걸려온 전화를 통해 정국이가 자살시도를 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일이고 뭐고 달려와 상태를 확인해보니 그런 생각을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인 정국이를 마주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저 작은 머리로 몇번이나 죽고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보내왔을까

이 모든 원흉이 자신인 것만 같아 정국이를 끌어안고 몇번이고 속삭였다.

 

 

 

 

 

 

 

 

"정국아 미안해 형이 미안해"

 

 

 

 

"왜이래요 낯간지럽게"

 

 

 

 

 

 

 

 

밀어내려는 손을 마주잡고는 한참을 그렇게 정국이의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그 날 이후로 병실안에 자살시도를 할 수 있는 모든 물건들을 치웠다.
날카로운 것들 위주로 정국이가 생활하면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만큼의 물건들만을 남겨놓고

하루종일 무슨 일은 없는지 감시할 수 있는 간병인도 붙여줬다.
평일은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 주말은 무슨일이 있어도 다 미루고 정국이를 만나러 왔다.
병실에서 잠을 청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넓은 병실이라지만 좁은 침대에 둘이 부대끼며 누워 작게 나 있는 창문 밖으로 별이 수놓아진 하늘을 보며 잠에 들었다.

 

 

 

 

 

 

 

 

"오늘 별 진짜 많이 떴다"

 

 

 

 

"예쁘네 우리 정국이보단 못하지만"

 

 

 

 

"아 형 그런 소리 할때마다 토나와요"

 

 

 

 

"뭐? 토할 정도야?"

 

 

 

 

 

 

 

 

키득거리면서 장난을 치다가 갑자기 찾아온 정적에 별을 올려다보고 있는 정국이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작게 속삭이듯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언제쯤이면 저 별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볼 수 있지 않을까"

 

 

 

 

"우주로 가거나 하면 볼 수 있을까"

 

 

 

 

"그러면 로켓이라도 타야겠네"

 

 

 

 

"꿈에서도 갈 수 있어요"

 

 

 

 

"그러면 얼른 자자"

 

 

 

 

"그럴까요"

 

 

 

 

 

 

 

 

눈을 맞추며 웃는 정국이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미 네 자체가 나에게는 세상이고 우주야
빛나는 별들을 가득담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을때면 수많은 별들과 함께 우주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기분이 들어
너는 네 눈이 우주를 담고 있다는걸 알까

눈을 감는 정국이를 토닥여주면서 태형이는 생각했다.

 

 

 

 

 

 

 

 

 

 

 

 

 

 

 

 

 

 

 

 

 

 

 

 

 

 

 

 

 

 

또 다시 행복한 토요일이 돌아왔다.
오늘은 업무량이 적어 생각보다 일찍 병원에 도착했고 차에서 내리면서 안쪽에 고히 모셔두었던 꽃다발을 꺼내들었다.
요즘 들어 부쩍 우주 얘기나 별 얘기를 자주하는 정국이였기에 직접 별을 보여줄 수는 없지만 별을 닮은 꽃들을 모아서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기분좋은 꽃 향기를 맡으면서 병원 안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요란하게 휴대폰이 울려댔다.

 

 

 

 

 

 

 

 

"여보세요"

 

 

 

 

"태형씨! 지금...정국씨가!"

 

 

 

 

 

 

 

 

제대로 전화를 끊지도 못하고 응급실로 뛰어들어간 태형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정국이를 찾아해맸다.
저멀리서 모여있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보이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힘겹게 발을 뗐지만 몇번이고 다른 사람들과 부딪혔고

들고있던 꽃다발은 이미 바닥을 나뒹굴고 짓밟히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차오르는 눈물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침실에 누워있는 사람이 정국이라는걸 확인하자 축 늘어진 손을 잡고 오열하는 태형이였다.

 

 

 

 

 

 

 

 

"정국아!..제발 눈 좀 떠봐 응? 형 왔잖아"

 

 

 

 

 

 

 

 

지혈을 위해 감아놓았던 붕대와 솜들이 이미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정국이의 볼을 감싸고 몇번이고 입을 맞추어보지만 점점 온기를 잃어가는 차가운 감촉만이 느껴졌다.
미친 사람처럼 구는 태형이를 떼어낸 간호사가 정국이 얼굴위로 흰 천을 덮어냈다.

 

 

 

 

 

 

 

 

"*월 **일 **시 **분..."

 

 

 

 

 

 

 

 

그렇게 빛나던 나의 우주는 사라졌다.
감은 두 눈안에 자리잡은 우주를, 빛나는 별들을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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