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피트의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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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그리스신화에서 등장하던 사랑의 결실을 맺어준다는 큐피트가 현실에도 존재했다면 아마 멍청하다못해 미련한 놈이지 않을까 싶다.

내 큐피트가 실수로 저녀석한테 화살을 쏜건 아닐까

무뚝뚝하고 조용하고 얼굴만 반반한 저 후배녀석에게 말이다.

 

 

 

 

 

 

 

 

"윤기형! 여기요!"

 

 

 

 

 

 

 

 

시끄러운 비글 한마리, 그나마 조용한 비글 한마리를 각각 양 사이드에 끼고서 밥을 먹고 있던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시선이 몇초간 서로에게 머물러 있다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밥을 퍼먹는 동그란 정수리를 보며 입술을 씹어댔다.
녀석의 얼굴에 떠오르는 저 표정을 볼때마다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렇게 크게 안불러도 알아들어"

 

 

 

 

"오늘 소세지볶음 진짜 맛있어요"

 

 

 

 

"너나 많이 먹어"

 

 

 

 

 

 

 

 

동문서답이 주특기인 김태형답게 소세지볶음 찬양이나하고 앉아있는 모습이 22살이 아니라 2학년 2반 초등학생 같았다.
분명히 머리로는 김태형이나 박지민 앞에 앉아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몸이 지멋대로 전정국 앞에 자리를 잡은 탓에 쉬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묵묵히 밥을 먹고 있던 정국의 시선이 젓가락으로 반찬들을 뒤적거리고 있는 윤기의 식판으로 향했다.
툭하면 사소한걸로 옥신각신하는 비글 두마리를 구경하던 윤기가 열심히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자신의 식판을 뚫어지게 보고있는 정국이를 발견했다.

 

 

 

 

 

 

 

 

"먹을래?"

 

 

 

 

 

 

 

 

언제 다 먹은건지 식판 가운데가 비어있었다.
소세지 볶음이 놓여있던 자리 같은데...자신의 식판에 놓여있던 소세지 하나를 집어들어 내밀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정국이 자연스레 입으로 받아먹었다.
놀란 윤기의 표정을 본 정국이 자신이 무의식중에 한 행동을 알아차리고는 굳은 표정으로 우물거리던 입을 멈췄다.

보통 건네주면 젓가락이나 숟가락으로 가져가 먹는게 당연한거 아닌가?

아기새가 모이를 받아먹듯 바로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이 윤기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갑자기 벌떡 일어선 정국이 말없이 식판을 집어들어 식판 수거대로 가져다 놓고는 재빠르게 학생식당을 빠져나갔다.

 

 

 

 

 

 

 

 

"야! 꾹아 어디가!"

 

 

 

 

"정국아! 나 아직 다 안먹었는데, 형 저희 먼저 가볼게요!"

 

 

 

 

 

 

 

 

한참을 투닥거리다가 뒤늦게 정국이가 나가는 뒷모습을 확인한 태형과 지민이 헐레벌떡 뒤를 쫓았다.
남겨진 윤기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시발...귀여워"

 

 

 

 

 

 

 

 

 

 

 

 

 

 

 

 

 

 

 

 

 

 

 

 

 

 

 

 

 

전공수업은 그렇다쳐도 교양수업은 다른 학과랑 같이 듣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생판 모르는 얼굴들이 가득한 수업을 듣는것이 일반적이였다.
이제 지긋지긋한 교양수업도 이번학기가 마지막이였고 자신이 나름대로 흥미를 느끼는 과목이였기에 기분좋게 강의실문을 열고 들어선 윤기였다.
아직 수업시간까지 널널하게 남은 탓인지 빈자리가 가득했고 교수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강의내용은 잘 보일만한 좋은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창가쪽을 훑어보고 있었는데 익숙한 정수리가 눈에 띄였다.

 

 

 

 

 

 

 

 

"전정국이다"

 

 

 

 

 

 

 

 

이제 동그란 정수리만 봐도 그녀석인걸 알 정도가 된 자신이 웃기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낮게 읊조린 윤기가 지체없이 걸음을 옮겼다.
비어있는 옆자리에 가방을 올려놓자 흠칫한 정국이가 누군가하고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전정국 너 이 수업듣냐"

 

 

 

 

"네"

 

 

 

 

 

 

 

 

언제나 시선도 맞추지 않고 내뱉는 저 단답이 사람 속을 뒤집어놨다.
무심한 표정, 할말 없게 만드는 대답, 돌아가버린 고개 이 쓰리콤보를 겪는 날에는 하루종일 답답한 가슴앓이를 해야했던 윤기였다.
이젠 그마저도 익숙해지려고 하니 사랑을 하는게 아니라 체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모순적인 하루 하루에 어떤 돌파구를 찾아야할지 막막했다.

큐피트 이새끼는 좋아하게 만들었으면 상대방을 어떻게 꼬셔야 하는지 알려주기라도 하던가 아니면 전정국 가슴에 화살이라도 쏘던가 해야지

 

 

 

 

 

 

 

 

"너도 이 과목에 관심있었어?"

 

 

 

 

"예전부터 좋아했어요"

 

 

 

 

 

 

 

 

순간 앞뒤 상황 다 자르고 좋아했다는 말만 들었으면 고백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안그래도 흰 피부 탓에 붉어지면 금새 티가나는 윤기였기에 '아, 그렇구나' 대충 얼버무린 후 졸린 척 팔에 고개를 파묻고 엎드릴 수 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내가 할말이 없게 만들었지만 24살이나 되서는 짝사랑 상대를 눈앞에 두고 수줍어 한다는게 자기자신이 느끼기에는 한없이 부끄러운 일이였다.
좋아한다는 마음이란게 굳이 입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과를 위하여~!"

 

 

 

 

"위하여!"

 

 

 

 

 

 

 

 

윤기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과모임이였다.
그냥 오순도순 모여서 회의하고 밥먹는거면 괜찮은데 꼭 호프집을 장소로 정해서 술을 퍼마신다는게 맘에 들지 않았다.
물론 술을 마시는것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였다, 다만 술자리를 빌미로 짓궂은 장난을 치거나

후배를 꼬신다던가 하는 그런식의 수법이 비일비지하니까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우리 게임하자 게임"

 

 

 

 

"**이가 좋아하는 랜덤게임~ 무슨게임~ 게임 스타트!"

 

 

 

 

"눈치게임 1!"

 

 

 

 

"2!"

 

 

 

 

 

 

 

조용히 술 좀 마시려고 했더니 게임을 하자는 말이 나오자 시끄러워진 테이블에 인상을 찌푸리던 윤기가

일찍 끝내버리겠다는 생각으로 5를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맞은편에 앉아있던 정국이도 같이 몸을 일으켰다.

전정국이랑 같이 일어났다, 통한건가

 

 

 

 

 

 

 

 

"오오~! 민윤기랑 정국이 러브샷 가자 러브샷"

 

 

 

 

"남자끼리 뭔 러브샷이야"

 

 

 

 

"야! 우리과 대부분이 남자거든? 재미없게 이럴래?"

 

 

 

 

 

 

 

 

얼른 하라고 부추기는 목소리가 하나 둘 커져가고 당황한 표정을 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정국이를 보며 짝사랑 상대랑 러브샷이라니

좋아해야 될 일인지 곤란해야 할 일인지 알 수 없는 윤기가 걸음을 옮겼다.
서로 마주보는 상태가 되자 평소에도 큰 눈이 몇 배는 더 커져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정국이의 얼굴 탓에 이상한 기분이 드는 윤기였다.

어차피 끌어안고 술만 마시면 되는건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는건지

술잔을 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오는게 행여나 누가 볼까 급하게 정국이 뒷목으로 팔을 감싸며 속삭였다.

 

 

 

 

 

 

 

 

"얼른 하고 끝내자 잔 들어"

 

 

 

 

 

 

 

 

살짝 떨려오는 목소리를 알아챘을까
정국이의 표정이 어떤지 보고싶었지만 거의 끌어안는듯한 자세에 보이는거라곤 고르게 자리잡은 귀와 곧게 뻗은 목덜미뿐이였다.
이 자식은 귀도 잘생겼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뒷목을 감싸오는 정국이의 손길에 망설임 없이 잔을 들이켰다.
몇초도 안걸렸을 그 시간만 늘어난 테이프처럼 천천히 스쳐지나가는 느낌에 쓰디 쓴 술맛이 배로 느껴졌다.

전정국 귀 빨개졌네

 

 

 

 

 

 

 

 

 

 

 

 

 

 

 

 

 

 

 

 

 

 

 

 

 

 

 

 

 

 

같은 교양수업을 들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종강이라니 하늘이 무심하다는 생각을 하며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못내 아쉬운 윤기였다.
유일하게 정국이를 독점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졸음이 쏟아질 것 같은 교수님의 수업도 열심히 들을 수 있었고

가끔 잠을 못이기고 꾸벅꾸벅 조는 정국이를 몰래 구경하면서 만족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였다.
종강이란 단어가 들려오자 이제 곧 방학이라는 것과 이 녀석 없는 몇개월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오늘 이 수업 종강이잖아 기분 좋냐"

 

 

 

 

"네 방학이니까"

 

 

 

 

 

 

 

 

방학이니까 들떠있을줄 알았는데 묘하게 가라앉은 얼굴하며 약간의 뜸을 들이면서 말하는 것도 그렇고 기분이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너도 기분 안좋냐 나도 기분 안좋은데 너 못보니까

속으로는 얼마든지 떠벌릴 수 있는 말을 곱씹으며 출석체크를 하시는 교수님의 부름에 애써 담담한척 크게 대답했다.
다른 수업때보다 훨씬 더 집중력이 흐트러져 있었다.
옆에 있는 전정국 또한 그런것인지 아까부터 공책에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이고 지우고 반복하고 있었다.
내용이 궁금해서 조금이라도 정국이 쪽으로 몸을 기울이려고 하면

거의 엎드리다싶이 고개를 숙이고는 철벽방어를 하는 탓에 무얼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뭐해'라고 적은 종이쪽지를 슬쩍 건네자 펴보고는 종이를 뒤집어서 적어내렸다.
사각거리는 연필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게 침울했던 기분이 서서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중 고등학교때나 하던 쪽지 주고받기를 대학교와서 할줄이야
전정국은 나를 유치하게 만드는 신비한 재주가 있는게 아닐까

그 작은 종이에 쓸게 얼마나 많다고 아까부터 숙여있던 고개가 들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속 썼다 지우는 통에 너덜너덜해진 종이쪽지가 손위에 놓여졌고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선배 생각이요'

 

 

 

 

잘못 쓴건가 싶어 몇번이고 들여다 보아도 정갈한 글씨체로 써져 있는 것은 선배 생각이요 였다.
정국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교수님을 쳐다보면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아니, 귀 끝이 빨개진거 보면 아무렇지 않은건 아닌가보다.

 

 

 

 

 

 

 

 

 

 

 

 

 

 

 

 

 

 

 

 

 

 

 

 

 

 

 

 

 

 

"날씨 너무 덥다"

 

 

 

 

"죽기 좋은 날씨야"

 

 

 

 

"형 아이스크림 사줘요"

 

 

 

 

"네가 사다먹어"

 

 

 

 

"와 진짜 이러기야"

 

 

 

 

 

 

 

 

종이쪽지가 원인이라면 결과는 성공적인 고백이였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녀석을 끌고 나가 대뜸 예전부터 너 좋아했어 그러니까 사귀자 강요하는건 아냐 거절할꺼면 거절해 라고 속사포로 쏟아붓자

어버버 거리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생각해보니까 너 진짜 바보같았다"

 

 

 

 

"뭐요?"

 

 

 

 

"고백 받으니까 당황해서는"

 

 

 

 

"그때 얘기 안하기로 했잖아요"

 

 

 

 

"귀여워서"

 

 

 

 

"닥쳐요"

 

 

 

 

"애인한테 닥쳐요가 뭐야 임마"

 

 

 

 

"애인한테 임마가 뭐에요 임마가"

 

 

 

 

 

 

 

 

투닥거리더니 더운 날씨 탓인지 다시 늘어진 정국이를 보며 가지고 있던 부채로 부채질을 해주던 윤기가 말을 이어나갔다.

 

 

 

 

 

 

 

 

"난 처음에 무뚝뚝하고 조용하던 네가 왜 좋아진지 몰라서"

 

 

 

 

"네"

 

 

 

 

"현실에도 큐피트가 있다면 그 새끼가 실수로 화살을 잘못 맞춘 줄 알았을 정도로 어이가 없었어"

 

 

 

 

"그게 뭐에요"

 

 

 

 

"그냥 그랬다고 비웃냐"

 

 

 

 

 

 

 

 

뜬금없는 윤기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던 정국이가 손에 든 부채를 빼앗아 윤기한테 부채질을 해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그거 실수 아니에요"

 

 

 

 

"뭐가"

 

 

 

 

"제가 매일 좋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니까 실수 아니라 정확히 맞춘거에요"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리는 정국이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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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안의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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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언제쯤이면 저 별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까요?"

 

 

 

 

 

 

 

 

아주 먼 미래, 적어도 몇 십년이 흐른 후였으면 좋겠어 정국아

 

 

 

 

 

 

 

 

"언젠가는 볼 수 있지 않을까"

 

 

 

 

 

 

 

 

 

 

 

 

 

 

 

 

 

 

 

 

 

 

 

 

 

 

 

 

 

 

시끄러운 클락션 소리가 귓가를 울려댔다.
차들이 뿜어내는 매캐한 연기가 깊게 들이마신 숨과 함께 밀려들어와 저절로 기침이 새어나오게 만들었고 높디 높은 빌딩에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얼른 이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더욱 더 속도를 내어 달렸다.

 

 

 

 

 

 

 

 

"오늘도 오셨네요"

 

 

 

 

"네, 매번 잘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마 조용하고 공기 맑은 서울 외곽에 위치한 큰 병원 안을 들어설때마다

목에 꽉 매여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내고 격식있게 차려입느라 단정하게 정돈한 머리도 맘에 들지 않아 몇번이고 헝클어트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자유분방하게 살기를 원했던 내가 매일 아침마다 정장을 차려입고 머리를 매만지며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대기업으로 출근을 하는 이유는 오로지 사랑하는 나의 연인 때문이였다.
억지로 물려받은 이사라는 직책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하루종일 사무실 의자에 앉아 머리를 굴려가며 계획서를 짜내고 자잘한 계약건, 승인서 등과 같은

빽빽한 용지에 싸인을 하는 일을 묵묵히 해내는건 일주일 중 단 이틀뿐이지만 힘들었던 5일을 잊게 만들기엔 충분한 달디 단 보상을 받기 위해서였다.

 

 

 

 

 

 

 

 

"정국아 형 왔어"

 

 

 

 

"역시 형이구나"

 

 

 

 

"이번에도 발걸음 소리만 듣고 안거야?"

 

 

 

 

"네 구두소리가 들렸어요"

 

 

 

 

"역시 우리애인은 달라도 뭔가 다르네"

 

 

 

 

 

 

 

 

수많은 환자들이 생활하는 병실들을 지나쳐 복도 끝에 놓여진 호화스러운 1인용 병실문을 열고 들어서면

새하얀 병원복을 입고있는 내 연인이 맑은 웃음을 지으면서 나를 반겨준다.
정국이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는 내가 없었던 5일동안 어떻게 생활했는지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신나서 떠드는 목소리를 듣는 이 순간이 찾아올때마다

진정한 주말을 맞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도 고생했어요 형"

 

 

 

 

 

 

 

 

가볍게 머리를 매만져주는 손길에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머리를 부비적 대다가 고개를 들어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산책 나갈까? 요즘 날씨도 좋던데"

 

 

 

 

 

 

 

 

고개를 끄덕이는 정국이를 익숙하게 안아들고는 휠체어에 앉혔다.
더운 날씨인만큼 얇은 담요를 덮어주고 휠체어를 밀고 병실 밖을 나서는 태형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씁쓸해보였다.

 

 

 

 

 

 

 

 

 

 

 

 

 

 

 

 

 

 

 

 

 

 

 

 

 

 

 

 

 

 

정국이가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지 올해로 3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3년 전, 여느때와 다름없이 태형이와의 만남을 위해 길을 나서던 정국이를 들이받은건 부모님차를 몰래 타고 여행을 떠나려던 고등학생 무리들이였다.
무면허로 운전을 했던 탓에 미숙한 핸들조절과 신나게 웃고 떠들면서 난잡해진 차안이 문제였던 것이였다.
마주오는 차량을 피하기 위해 급하게 핸들을 꺾었는데 때마침 신호를 기다리던 정국이를 그대로 치고

가로등에 부딪혀 안에 타고 있던 고등학생들도 큰 부상을 입었었다.
곧바로 응급실로 실려간 정국이는 의료진의 빠른 대처로 목숨은 건졌지만 하반신 마비라는 판정을 받았다.
급하게 연락을 받고 달려간 태형이는 새근거리며 잠들어있는 정국이의 모습을 보고 안도했지만

이내 자신을 불러내 뜸을 들이는 의사의 태도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저..전정국씨 보호자분"

 

 

 

 

"네 제가 보호자에요"

 

 

 

 

"정국씨가 신경손상으로 하반신 마비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네?..."

 

 

 

 

 

 

 

 

하반신 마비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저렇게 만든 새끼들 어딨냐면서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리는 탓에 간호사와 의사까지 태형이를 말리려고 애를 썼었다.
어느정도 진정을 한 태형이가 누워있는 정국이의 손을 잡으면서 차라리 자신이 이런 일을 겪었어야 했다면서 나지막이 울부짖었다.

 

 

 

 

 

 

 

 

 

 

 

 

 

 

 

 

 

 

 

 

 

 

 

 

 

 

 

 

 

 

정국이는 전국대회를 목표로 하는 유망한 육상선수였다.
태형이가 정국이한테 첫눈에 반한날도 정국이가 열심히 트랙을 달리던 날이였다.
그날도 지금처럼 무더운 날이 지속되는 여름의 한가운데였다.

 

 

 

 

 

 

 

 

"이제 뭐해먹고 살지"

 

 

 

 

 

 

 

 

대기업 회장의 아들치고는 후줄근한 옷을 걸쳐입고는 아이스크림 막대를 입에 물고 먹고 살 걱정을 하는 태형이 앞으로

단체로 훈련을 나온 것인지 맞춰입은 체육복을 입고 달려가는 무리들이 지나갔다.

이 더운 날씨에 어떻게 저렇게 뛰어

자신이 뛰는 것도 아닌데 질색한 표정을 하고 지나가는 학생들을 쳐다보던 태형이 한순간 정국이와 눈이 마주쳤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고 콧대를 따라 흐르던 땀방울이 턱선을 지나 목까지 흘러내리는 모습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남자치고는 큰 눈과 예쁘장한 얼굴이 무리들이 지나간 후에도 한참이나 태형을 그 자리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멀어져가는 정국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예쁘다 중얼거리고는 그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같은 시간대에 그 자리에 나와 정국이의 뛰는 모습을 구경했다.
처음에는 마주치기만 했던 것이 서로 고개 숙여 가벼운 인사도 하고 나중에는 번호도 교환하고 그렇게 순조롭게 연애라는 단계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종종 태형이와 얘기를 나눌때면 들뜬 얼굴로 자신의 미래에 대해 들려주던 정국이였다.

 

 

 

 

 

 

 

 

"저는 나중에 세계대회도 노려볼꺼에요, 달리는게 너무 좋아요"

 

 

 

 

"달리다보면 옆구리도 아프고 힘들지 않아?"

 

 

 

 

"그 느낌이 좋아요 숨이 차서 옆구리가 아프고 땀을 비 오듯 쏟고나면 아, 내가 살아있구나 하고 느껴요"

 

 

 

 

 

 

 

 

그런 자신의 연인이 하반신 마비라니 믿고 싶지도 믿을 수도 없는 꿈 같은 이야기였다.

 

 

 

 

 

 

 

 

 

 

 

 

 

 

 

 

 

 

 

 

 

 

 

 

 

 

 

 

 

 

깨어난 정국이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형 저 진짜 죽는줄 알았어요 차가 막 달려오는데 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태형이 모습에 반쯤 몸을 일으켜 인사를 나누고는 당시 상황에 대해 얘기를 하던 정국이가

평소와 다르게 어두운 낯을 띄고 있는 태형이의 얼굴에 의아함을 느꼈다.

 

 

 

 

 

 

 

 

"목마르다 저 물 좀 마시고 올게요"

 

 

 

 

"아니! 정국아 내가 줄...게"

 

 

 

 

 

 

 

 

태형이가 말릴새도 없이 이불을 걷어내고는 움직이려던 정국이가 들리지 않는 하반신에 힘껏 힘을 주었지만 미동도 없이 가만히 놓여져 있는 두 다리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태형이와 제 다리를 번갈아가면서 쳐다보았다.

 

 

 

 

 

 

 

 

"형 이거 왜 이래요? 이상하다 왜이래"

 

 

 

 

"..."

 

 

 

 

"여기 뭐 올려놨...아니, 마취한거에요? 왜 안움직이지"

 

 

 

 

"..."

 

 

 

 

"형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제발요 네? 태형이형"

 

 

 

 

 

 

 

 

애써 부정하고 싶은 현실에 밝게 말하던 정국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태형이를 보자

울컥하고 올라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형 저 다리 못쓰는거에요? 그런거에요?"

 

 

 

 

"정국아..."

 

 

 

 

 

 

 

 

태형이의 부름도 소용없는지 혼자서 중얼거리던 정국이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면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런 정국이 모습에 가슴이 아파오는 태형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우는 정국이를 끌어안아 다독이는 것 밖에는 없었다.

 

 

 

 

 

 

 

 

"형..저 이제 어떻게 살아요"

 

 

 

 

"나 있잖아 정국아 제발"

 

 

 

 

 

 

 

 

이제 자신이 좋아하던 달리기도 세계대회에 나가겠다는 꿈도 모든게 산산히 부서진 정국이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연인 태형뿐이였다.

 

 

 

 

 

 

 

 

 

 

 

 

 

 

 

 

 

 

 

 

 

 

 

 

 

 

 

 

 

 

"정국이 지금 어디있어요?"

 

 

 

 

 

 

 

 

전화를 받자마자 급하게 달려온 태형이가 안내데스크에 묻자 병실안에 있다는 간호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빠르게 병실로 달려가 문을 열어젖혔다.
새하얀 침대에 누워서 형 왔어요? 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정국이한테로 다가가 두 어깨를 잡아 시선을 맞췄다.

 

 

 

 

 

 

 

 

"정국아 너"

 

 

 

 

"응 왜 불러요"

 

 

 

 

 

 

 

 

더 뭐라고 말을 해야되는데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에 깊은 한숨만 내뱉고는 시선을 내리는 태형이였다.
손목에 감겨진 하얀붕대를 보자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실에 누워있던 그 날이 생각나 가슴이 아려왔다.
몇달간은 병원에서 지내야한다는 의사의 말에 앞으로 내야할 병원비와 여러가지 필요한 돈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사자리에 앉은 이상

회사가 굴러갈 수 있도록 일을 해야했기에 정국이를 방치해둔 제 잘못이 컸다.
열심히 업무를 하는 도중에 걸려온 전화를 통해 정국이가 자살시도를 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일이고 뭐고 달려와 상태를 확인해보니 그런 생각을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인 정국이를 마주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저 작은 머리로 몇번이나 죽고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보내왔을까

이 모든 원흉이 자신인 것만 같아 정국이를 끌어안고 몇번이고 속삭였다.

 

 

 

 

 

 

 

 

"정국아 미안해 형이 미안해"

 

 

 

 

"왜이래요 낯간지럽게"

 

 

 

 

 

 

 

 

밀어내려는 손을 마주잡고는 한참을 그렇게 정국이의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그 날 이후로 병실안에 자살시도를 할 수 있는 모든 물건들을 치웠다.
날카로운 것들 위주로 정국이가 생활하면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만큼의 물건들만을 남겨놓고

하루종일 무슨 일은 없는지 감시할 수 있는 간병인도 붙여줬다.
평일은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 주말은 무슨일이 있어도 다 미루고 정국이를 만나러 왔다.
병실에서 잠을 청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넓은 병실이라지만 좁은 침대에 둘이 부대끼며 누워 작게 나 있는 창문 밖으로 별이 수놓아진 하늘을 보며 잠에 들었다.

 

 

 

 

 

 

 

 

"오늘 별 진짜 많이 떴다"

 

 

 

 

"예쁘네 우리 정국이보단 못하지만"

 

 

 

 

"아 형 그런 소리 할때마다 토나와요"

 

 

 

 

"뭐? 토할 정도야?"

 

 

 

 

 

 

 

 

키득거리면서 장난을 치다가 갑자기 찾아온 정적에 별을 올려다보고 있는 정국이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작게 속삭이듯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언제쯤이면 저 별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볼 수 있지 않을까"

 

 

 

 

"우주로 가거나 하면 볼 수 있을까"

 

 

 

 

"그러면 로켓이라도 타야겠네"

 

 

 

 

"꿈에서도 갈 수 있어요"

 

 

 

 

"그러면 얼른 자자"

 

 

 

 

"그럴까요"

 

 

 

 

 

 

 

 

눈을 맞추며 웃는 정국이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미 네 자체가 나에게는 세상이고 우주야
빛나는 별들을 가득담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을때면 수많은 별들과 함께 우주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기분이 들어
너는 네 눈이 우주를 담고 있다는걸 알까

눈을 감는 정국이를 토닥여주면서 태형이는 생각했다.

 

 

 

 

 

 

 

 

 

 

 

 

 

 

 

 

 

 

 

 

 

 

 

 

 

 

 

 

 

 

또 다시 행복한 토요일이 돌아왔다.
오늘은 업무량이 적어 생각보다 일찍 병원에 도착했고 차에서 내리면서 안쪽에 고히 모셔두었던 꽃다발을 꺼내들었다.
요즘 들어 부쩍 우주 얘기나 별 얘기를 자주하는 정국이였기에 직접 별을 보여줄 수는 없지만 별을 닮은 꽃들을 모아서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기분좋은 꽃 향기를 맡으면서 병원 안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요란하게 휴대폰이 울려댔다.

 

 

 

 

 

 

 

 

"여보세요"

 

 

 

 

"태형씨! 지금...정국씨가!"

 

 

 

 

 

 

 

 

제대로 전화를 끊지도 못하고 응급실로 뛰어들어간 태형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정국이를 찾아해맸다.
저멀리서 모여있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보이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힘겹게 발을 뗐지만 몇번이고 다른 사람들과 부딪혔고

들고있던 꽃다발은 이미 바닥을 나뒹굴고 짓밟히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차오르는 눈물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침실에 누워있는 사람이 정국이라는걸 확인하자 축 늘어진 손을 잡고 오열하는 태형이였다.

 

 

 

 

 

 

 

 

"정국아!..제발 눈 좀 떠봐 응? 형 왔잖아"

 

 

 

 

 

 

 

 

지혈을 위해 감아놓았던 붕대와 솜들이 이미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정국이의 볼을 감싸고 몇번이고 입을 맞추어보지만 점점 온기를 잃어가는 차가운 감촉만이 느껴졌다.
미친 사람처럼 구는 태형이를 떼어낸 간호사가 정국이 얼굴위로 흰 천을 덮어냈다.

 

 

 

 

 

 

 

 

"*월 **일 **시 **분..."

 

 

 

 

 

 

 

 

그렇게 빛나던 나의 우주는 사라졌다.
감은 두 눈안에 자리잡은 우주를, 빛나는 별들을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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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애가 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직접 태형이형이 다니는 대학교까지 찾아가기로 했다.
지금 쯤이면 형도 끝나지 않았을까
먼저 키스까지 할 정도면 좋은 쪽으로 대답이 나올거라는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정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3년 동안 질질 끌었던 짝사랑이 오늘 안에, 어쩌면 곧 끝이 난다는것에 시원섭섭한 기분과 함께 가슴 한켠이 시려왔다.
이제는 정말 끝맺음을 해야된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이제 마지막 수업도 끝났을텐데"

 

 

 

 

 

 

 

 

두리번 거리다가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여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었다.

 

 

 

 

 

 

 

 

"태형이ㅎ..."

 

 

 

 

 

 

 

 

아는척을 하려 했는데 태형의 옆에서 같이 걸어나오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린 정국이였다.
1년전 쯤인가 여느날과 다름없이 태형의 집에 놀러갔던 정국이 목격한 것은 꽤 충격적인 모습이였다.
태형과 같은 또래로 보이는 낯선 남자가 태형과 진하게 키스를 하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가 아니고서야 정황상 섹스를 하기 직전인 둘의 모습에 그날은 그간 모아뒀던 눈물들을 다 쏟아내기라도 하듯이 밤새껏 울고 또 울어서 다음날 태형에게 붕어라는 놀림까지 당했었기에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첫사랑이나 다름없는 짝사랑 상대가 섹스하려는 모습을 본 것도 모자라 그 상대방이 지금 태형과 같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저 남자라니

금방이라도 또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였다.

 

 

 

 

 

 

 

 

"어? 꾹아?"

 

 

 

 

"꾹? 얘가 네가 말한 정국이란 얘야?"

 

 

 

 

"안녕하세요..."

 

 

 

 

 

 

 

 

언제 발견한건지 동그란 정수리만을 보고도 정국이란걸 알아챈 태형이 말을 걸어왔다.
옆에 딸려 온 그 사람도 자신과 자주 만난 사이인 것 마냥 아는척을 해왔다.

 

 

 

 

 

 

 

 

"끝나고 전화한다고 했잖아 추운데 여기서 기다렸어?"

 

 

 

 

 

 

 

 

평소와 같이 다정한 손길로 두 볼을 감싸며 물어오는 태형에 기껏 참고 있는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괜히 코를 킁킁대며 시선을 피했다.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요 괜찮으니까 손 떼도 돼"

 

 

 

 

"안녕 정국아! 난 박지민이야 태태랑 동갑이고 같은과 다니고 있어"

 

 

 

 

 

 

 

 

자신보다 작아보이는 키에 환하게 미소를 짓자 접히는 눈꼬리와 그 주위로 과하지 않을만큼 붙은 살이 귀여움을 극대화 시켜 서글한 인상을 풍겼다.
누구나 다 귀여워할만한 페이스에 성격도 밝아 보이는게 자신과는 정반대인 모습이 태형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안그래도 우울했던 기분이

이제는 땅을 파고 들어갈 지경에 이르렀다.

 

 

 

 

 

 

 

 

"전정국 스물이에요"

 

 

 

 

"우리보다 두살이나 어리네? 귀엽다"

 

 

 

 

 

 

 

 

자연스럽게 볼을 잡아 당기는 손에 이걸 물어버려야하나 싶었는데 때마침 지민의 손을 쳐내는 태형이였다.

 

 

 

 

 

 

 

 

"박지민 수작 부리지마"

 

 

 

 

"정국이가 귀여워서 우쭈쭈 해준거야"

 

 

 

 

 

 

 

 

태형이형이 지민이라는 사람을 좋아해서 질투하는걸까
자신도 모르게 태형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는지 할 말 있냐고 묻는 형에 고개를 젓는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형 할 얘기 있다고 했잖아요"

 

 

 

 

"맞다 어디로 갈까 요 앞에 카페 갈까?"

 

 

 

 

"뭐야 둘만 노는게 어디있어 나도 껴줘"

 

 

 

 

"매일 놀러다니면서 지겹지도 않냐"

 

 

 

 

"너 말고 꾹이랑 놀고싶은거거든"

 

 

 

 

"네가 뭔데 정국이를 꾹이라고 불러 임마!"

 

 

 

 

"나는 부르면 안되는 법이라도 있어? 없잖아"

 

 

 

 

 

 

 

 

누가 태형이형 친구 아니랄까봐 유치한걸로 싸워서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게 똑 닮았다.
나름의 라이벌이라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쉽게 물리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레 생각해보는 정국이였다.

 

 

 

 

 

 

 

 

"형 그냥 집가서 얘기해요"

 

 

 

 

"단 둘이 집에가서 뭐하려고?"

 

 

 

 

"뭐하긴 얘기하러 가는거지"

 

 

 

 

"정국아 조심해 쟤 완전 늑대야"

 

 

 

 

 

 

 

 

오늘 처음 본 사이면서 사교성 좋게 어깨동무를 하더니 귓가에 속삭이는게 여간 불편한게 아니였다.
금방이라도 팔을 떨쳐내며 늑대인걸 어떻게 아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일단은 태형의 친구였고 자신 때문에 태형에게 피해가 가는건 정말 싫었기에

잠자코 지민의 말을 듣고있었다.

 

 

 

 

 

 

 

 

"저번에 한번 둘이서 술 마신 적이 있었는데 대뜸 키스를 해대더라고 그러니까 정국이도 조심해 큰일나~"

 

 

 

 

 

 

 

 

말안해도 다 아는 사실이였다.
단 둘이 술을 마신 날이 내가 목격한 그 날일 것이다.
태형이형이 술김에 키스를 한 것이라면 이 사람은 왜 밀어내지 않았고 그 날 어디까지 진도를 뺐으며

지금 둘 사이는 무슨 사이인지 물어보고 싶은게 너무 많았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침침 너 꾹이한테 무슨 소리 하는거야"

 

 

 

 

"내가 뭘?~"

 

 

 

 

"이자식이!"

 

 

 

 

"아 약속 늦겠다 나 먼저 가볼게 태태야 귀여운 꾹이도 안녕~~"

 

 

 

 

"다리도 짧은게 뛰다 다친다"

 

 

 

 

 

 

 

 

벌써 애칭까지 정한 사이라면 누가봐도 사귀는 사이잖아
결국 쌓였던 설움이 폭발했는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황급히 고개를 숙여 옷소매로 눈을 부비며 닦아보았지만 여태껏 참았던 탓인지 그치는게 쉽지않았다.

 

 

 

 

 

 

 

 

"꾹아 이제 가자"

 

 

 

 

 

 

 

 

지민이 가는 모습을 눈으로 배웅하던 태형이 고개를 돌리자 정국이의 어깨가 떨리는게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역시 오래 기다려서 추웠지? 괜찮은 척 하기는 얼른 따뜻한 곳으로 가자"

 

 

 

 

 

 

 

 

어깨를 감싸고 끌어당기려 했는데 도무지 발을 뗄 생각을 안하는 정국에 고개를 숙여 가까이 다가갔다.

 

 

 

 

 

 

 

 

"정국아 전정국 안갈꺼야?"

 

 

 

 

 

 

 

 

갑자기 고개를 홱 쳐드는 바람에 정국이의 머리와 태형의 코가 부딪혔다.
꽤 세게 부딪혔는지 찡하게 울려오는 코를 부여잡고 정국이를 쳐다봤는데 눈가가 벌게진 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형은!...아무하고나 키스해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숨 넘어갈듯이 울더니 큰소리로 외친다는게 저 소리다.
그것도 사람 많은 대학교 정문에서 말이다.

 

 

 

 

 

 

 

 

"정국아 일단 좀 집에가서 얘기하자 응?"

 

 

 

 

"됐어요! 얼른 방금 그 지민인가 지만인가 망개떡 같은 사람한테 가서 키스하고 섹스하고 다 하란 말이에요!

사람 가지고 놀아요? 어제는 저한테 키스하더니 저번에는 ㅈ..."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몰리는 시선들에 정국이의 입을 막고 빠른 걸음으로 학교를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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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때가 되자 추워진 날씨에 괜히 입에 문 담배 끝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추워서 담배도 못피겠네"

 

 

 

 

 

 

 

 

집안에서 피면 윗집에 피해가 간다나 뭐라나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집주인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나온건데 담배 피기도 전에 추워서 입 돌아가게 생겼다.

 

 

 

 

 

 

 

 

"추운데 여기서 뭐하세요 아 담배?"

 

 

 

 

 

 

 

 

인기척도 없이 어느새 옆에 서 있는 인영에 하마터면 꼴사납게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옆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떨궈버렸다.
아 옆집남자다
저 새끼 때문에 저번에 다 잡았던 기회도 놓치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가격에 한개비도 아까운 담배도 떨어트렸으니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많이 놀랐어요? 일부러 그런건 아닌데 미안해요"

 

 

 

 

 

 

 

 

슬쩍 올라간 입꼬리가 맘에 안든다.
웃을 때 휘어지는 눈꼬리도 거슬리고 조금 더 시선을 올려다봐야 하는 자신보다 큰 키도 한없이 불쾌했다.

 

 

 

 

 

 

 

 

"김남준 스물셋이에요"

 

 

 

 

 

 

 

 

한껏 구겨진 내 표정이 안보이는건지 일부러 무시하는건지 악수를 청해오는 뻔뻔한 손이 어이가 없어 조소가 흘러나왔다.

 

 

 

 

 

 

 

 

"뭐 어쩌라고"

 

 

 

 

"상대방이 소개를 했으면 자신도 소개하는게 예의잖아요"

 

 

 

 

"민윤기 스물넷"

 

 

 

 

"윤기형이네 잘부탁해"

 

 

 

 

"원래 통성명 하고나면 반말부터 찍찍 써대는게 예의인가보네"

 

 

 

 

"그게 친해지기 좋잖아"

 

 

 

 

 

 

 

 

나 너 싫으니까 얼른 꺼져란 티를 팍팍 내뿜으며 말하고 있는데 아까부터 웃으면서 말을 걸어오는 이 녀석은 도대체 뭐하는 놈이지
김태형은 바보라서 싫은 티 내도 모른다지만 김남준이란 저 놈은 백퍼센트 알고서도 무시하는거다.

 

 

 

 

 

 

 

 

"앞으로 자주 볼텐데 잘 지내자 윤기형"

 

 

 

 

"자주 볼 일이 있으려나"

 

 

 

 

"저번에 키스 방해한거 때문에 그래?"

 

 

 

 

 

 

 

 

직설적인 남준의 말에 하나 더 꺼내고 있던 담배를 또 바닥에 떨궈버린 윤기였다.
점점 참을성이 바닥나고 있다는걸 보여주듯이 떨어진 담배를 발로 짓이기듯 밟아버렸다.

 

 

 

 

 

 

 

 

"알면 좀 가라"

 

 

 

 

"싫은데"

 

 

 

 

"시발 너 진짜 뭐하는 새끼야"

 

 

 

 

"음...민윤기한테 관심있는 새끼?"

 

 

 

 

 

 

 

 

태연하게 내뱉은 말 치고는 내용은 핵폭탄 급이였다.
날 언제 봤다고 관심이 생겼다는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건 기본이고

추워 죽겠는데 담배 하나 피려고 여기까지 나와서 저런 개같은 소리나 들어야 한다니

그날도 그렇고 이 녀석은 만날때마다 내 기분을 더렵게 만들었다.

 

 

 

 

 

 

 

 

"그날 딱 봤는데 취향인 사람이 어떤 남자랑 입술을 부비고 있길래 마음에 안들어서 시비 좀 걸었어"

 

 

 

 

"뭐야 이거 전정국보다 훨씬 또라이네"

 

 

 

 

"그게 누구야 키스하던 사람이야?"

 

 

 

 

"됐고 얼른 꺼져"

 

 

 

 

"와 형 매정하다 관심있다고 했는데 반응이 싸늘하네"

 

 

 

 

 

 

 

 

여기서 더 말을 섞다가는 본인만 피곤해질 것 같아 등을 돌려 발을 떼려 했는데 팔을 잡고 돌려 세우는 남준에 의해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말하기도 귀찮은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녀석을 올려다보자 입에 담배 하나를 물려주고는 불을 붙여준다.

 

 

 

 

 

 

 

 

"나 때문에 아까운 담배 떨궜잖아 보니까 같은거 피는 것 같아서"

 

 

 

 

 

 

 

 

담배곽을 흔들며 웃어주는데 여태까지 봐왔던 미소들과 다르게 짜증이 쌓이고 쌓여 바짝 열을 올리고 있던 것들이 싹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폐 속 깊숙히 파고든 담배연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한참을 녀석의 웃는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하나 더 달라는건가"

 

 

 

 

 

 

 

 

미소를 유지한 채 시선을 피하지 않는 모습에 윤기도 덩달아 계속 남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에 머금고 있던 담배를 손으로 가져가더니 남준의 얼굴로 연기를 뱉어냈고

그로인해 마른 기침을 몇 번 토해내는 남준을 보며 꽤 크게 웃어제끼는 윤기였다.

 

 

 

 

 

 

 

 

"병신아 속일걸 속여야지"

 

 

 

 

 

 

 

 

이런 독한 담배를 피면 아무리 적게 핀다지만 냄새가 몸에 베이는건 당연한거고

담배꽁초가 든 쓰레기 봉투가 눈에 띄여야 하는데 저 놈 짚앞에는 눈 씻고 찾아봐도 담배꽁초 끄트머리도 볼 수 없었다.

 

 

 

 

 

 

 

 

"담배 안피는거 들켰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모습이 조금은 귀엽게 보여 멈췄던 웃음이 다시 터져나왔다.

 

 

 

 

 

 

 

 

"아까 불 붙이는 것도 어색하더만"

 

 

 

 

"붙여본 것도 처음이라서 그래"

 

 

 

 

"허세 부리다가 가랑이 찢어진다"

 

 

 

 

"어차피 계속 맡아야될거 연습 좀 하려고 했지"

 

 

 

 

"담배 안핀다면서"

 

 

 

 

"형이랑 키스할껀데 모양 빠지게 기침하면 안되잖아"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정상은 아니란걸 깨닫게 만드는 신기한 재주가 있는 녀석이다.
허우대 멀쩡한게 뭐가 아쉬워서 나 같은 놈한테 관심을 가졌을까 싶은 윤기는 말을 잇기가 귀찮은지 담배만 피워댈뿐이였다.

 

 

 

 

 

 

 

 

"담배 떨군건 다 갚은거야"

 

 

 

 

 

 

 

 

남은 담배가 들어있는 곽을 손 위에 올려놔주고 바닥에서 짓이겨진 담배꽁초를 주워서 자기 주머니에 넣더니

보조개가 돋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맞춘다.

 

 

 

 

 

 

 

 

"담배 말고도 그 날 나 때문에 못했던 것도 갚을 수 있어 언제든지 옆집으로 와"

 

 

 

 

 

 

 

 

고개를 숙이더니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고는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 자기집으로 들어가버리는 남준이였다.

 

 

 

 

 

 

 

 

"진짜 미친놈이네"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던 윤기는 태우다 만 담배를 바닥에 버리며 발로 비벼 끄고는 어색한 몸짓으로 느릿하게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약간 붉어진 볼이 추워진 날씨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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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 차이

 

 

 

 

W.닻별

 

 

 

 

 

 

 

 

 

 

 

 

 

 

 

 

 

 

 

 

 

 

 

 

 

 

 

 

 

 

현관문을 여는 순간 나를 반기는 귀여운 딸아이와 잘 다려진 교복이 어울리는 학생 한명이 내 고된 일과에 대한 유일한 보상이라면 보상인 나날이다.

 

 

 

 

 

 

 

 

"아저씨!"

 

 

 

 

"아빠!"

 

 

 

 

"뛰다가 넘어질라"

 

 

 

 

"아빠 어서오세요 해야지 진희야"

 

 

 

 

"어서오..세요?"

 

 

 

 

"착하다 우리 진희"

 

 

 

 

 

 

 

 

이제 다섯살 남짓한 딸아이를 품에 안고 예뻐해주고 있으면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정국이 자신의 볼을 가리키며 속삭인다.
석진의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가 더욱 더 짙어지면서 이내 큰 웃음을 터트리더니 못이기는척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입에다 해달란 소리는 아니였는데요?"

 

 

 

 

"입에다 해달라는줄 알았지"

 

 

 

 

"아빠 뽀뽀 나도 뽀뽀"

 

 

 

 

"진희는 오빠랑 하자"

 

 

 

 

 

 

 

 

어느새 자신의 집에 드나드는게 일상이 되어버린 정국을 보면서 그와의 첫만남을 떠올리는 석진이였다.
9살이나 어린 고등학생을 사랑하게 될줄은 몰랐는데
정국이네 부모님이 아시면 한소리 좀 듣겠네
곤란한 표정을 짓는것도 잠시 뭐가 그렇게 좋은지 꺄르륵 웃어대는 진희와 정국을 바라보며 밝게 웃는 그였다.
지금의 행복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최근 들어 생긴 자신의 욕심이 담긴 기도가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이 곳으로 이사온 것은 지난 봄의 일이였다.
꽃샘추위가 다 가시기도 전에 자신의 아내를 떠나보내야 했고 남겨진 어린 딸의 손을 꼭 잡고 부랴부랴 이삿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추억이 남아있는 곳이 싫었다.
아니, 나에게 이별을 고한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이 집이 싫었다.

 

 

 

 

 

 

 

 

"아빠"

 

 

 

 

"응 진희야"

 

 

 

 

"우리 어디가?"

 

 

 

 

"우리? 집에 가야지"

 

 

 

 

"집?"

 

 

 

 

"응 우리집"

 

 

 

 

 

 

 

 

한창 엄마품을 벗어나지 않으려 할 어린나이인 딸이 무언가를 알기라도 한 것 마냥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게 마음이 쓰렸다.
물어본다한들 대답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가나고 비참해졌다.

 

 

 

 

 

 

 

 

"여기는 놀이터도 있고 진희 친구들도 많을꺼야"

 

 

 

 

"아빠는?"

 

 

 

 

"아빠?"

 

 

 

 

"응 아빠는 좋아?"

 

 

 

 

"그럼 우리 진희가 있는데"

 

 

 

 

"진희도 좋아!"

 

 

 

 

 

 

 

 

해맑게 웃는 아이의 웃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마음만이 앞섰던게 화근이였는지 아이와 놀아줄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일의 양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진희가 잠에 들고 나서야 집에 들어가는 일이 잦아졌고 밀린 업무로 인해 주말에도 컴퓨터를 붙잡고 놓지 못했다.

 

 

 

 

 

 

 

 

"진희야 아빠가 미안해"

 

 

 

 

 

 

 

 

잠든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자신의 손가락을 꼭 붙잡아오는 손에 깊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애기 몇 살이야?"

 

 

 

 

"다섯짤!"

 

 

 

 

"사탕...먹을래?"

 

 

 

 

 

 

 

 

다른날보다 일찍 일을 끝마치고 진희를 데리러 갔을때 처음으로 그와 마주했다.
근처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 아이와 쉴새없이 재잘거리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너무나 눈이 부셨다.
오랜만에 보는 딸의 웃음이였다.
아 저렇게 해맑게 웃던 아이였지
무언가에 머리를 맞은 듯 멍한 얼굴로 한참이나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빠!"

 

 

 

 

 

 

 

 

진희가 나에게로 뛰어오기 전까지

 

 

 

 

 

 

 

 

"안녕하세요"

 

 

 

 

"아...안녕하세요"

 

 

 

 

"뭐라 할 입장은 아니지만 애 혼자 이런 곳에 있으면 위험해요"

 

 

 

 

"죄송합니다"

 

 

 

 

"아니 저한테 죄송할건 아니고 아이한테 미안해해야죠"

 

 

 

 

 

 

 

 

학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차림새로 몇 번이고 잔소리를 했던 것 같다.
머리를 긁적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은 맑았지만 단호함이 깃들어있었다.

 

 

 

 

 

 

 

 

"진희야 오빠 갈게 나중에 봐"

 

 

 

 

"응! 잘가!"

 

 

 

 

"진희야 저 오빠 이름이 뭐야?"

 

 

 

 

"전구...정..구?"

 

 

 

 

"전구?"

 

 

 

 

"몰라 꾸오빠야"

 

 

 

 

"아무리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랑 말하면 안되는거야"

 

 

 

 

"그치만 딸기 사탕 줘써"

 

 

 

 

"맛있어?"

 

 

 

 

"응 마시써"

 

 

 

 

"그럼 됐다"

 

 

 

 

 

 

 

 

애를 잘 챙기지 못한 자기 탓이 크니 그냥 넘어가자는 생각을 하며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누구?...아 저번에 그"

 

 

 

 

"정국이요 전정국"

 

 

 

 

 

 

 

 

정국이라는 이름을 진희는 꾸라고 부르고 있었구나
평소에도 정국의 얘기를 자주하는 진희 때문에 웃음이 터져버린 석진이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해댔다.
갑자기 혼자 웃음을 터트리는 그를 보며 의아하게 생각하던 정국의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사람 앞에 두고 왜 웃어요"

 

 

 

 

"미안해요 그냥 진희 생각이 나서"

 

 

 

 

"진희는 잘 있어요? 저 막 찾고 그래요? 되게 예쁘고 귀엽던데 아저씨랑은 딴판이네요"

 

 

 

 

 

 

 

 

진희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밝아진 표정에 놀란것도 잠시 혼자서 말을 이어가는 정국을 보면서 그 나이또래 답다 생각하는 석진이였다.
이제보니 정갈하게 차려입은 교복 가슴팍에 전정국이라는 이름 석 자가 떡하니 박혀있는 명찰이 걸려있었다.

 

 

 

 

 

 

 

 

"정국학생이라고 하면 되나?"

 

 

 

 

"아저씨 여태까지 제 말 하나도 안 듣고 제 호칭 물어보는거에요?"

 

 

 

 

"미안해 원래 늙으면 귀에 잘 안들어오고 그래"

 

 

 

 

"허허 웃는게 누굴 닮았나 했더니 아저씨 닮았네요 그거 고쳐요 어린 여자애가 허허 웃다니 그게 뭐에요"

 

 

 

 

"이게 습관이라서..."

 

 

 

 

"또 허허 웃었다 안돼요 그거"

 

 

 

 

 

 

 

 

만날때마다 툴툴대는게 타고난 성격인지 진희와 얘기를 나눌때처럼 예쁘게 웃어줬으면 좋으련만 늘 어딘가 불만이 있는 얼굴이였다.
처음은 그저 스쳐갔고 두번은 얘기를 나눴으며 점점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가고 있었다.

 

 

 

 

 

 

 

 

"아저씨 저 진희 보러 가도 돼요?"

 

 

 

 

"지금도 가끔 보잖아"

 

 

 

 

"아니요 매일 보면 안돼요?"

 

 

 

 

"매일?"

 

 

 

 

"제가 여태까지 아저씨 썰렁한 농담도 참아주고 진희한테 딸기 사탕도 사다주고 여러모로 키워내고 있으니까 매일 보게 해주세요"

 

 

 

 

"어떻게 매일 보려고?"

 

 

 

 

"비밀번호 알려주세요"

 

 

 

 

 

 

 

 

도어락을 가리키며 말을 내뱉은 정국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진희를 보고싶어한다면야 상관은 없지만...어딘지 모르게 호기심에 들뜬 아이의 표정과도 같아 걱정이 되는 석진이였다.
망설이는 석진의 표정을 읽어낸 정국이 한쪽에서 놀고있던 진희를 데리고 와 무릎에 앉히며 말을 이어갔다.

 

 

 

 

 

 

 

 

"진희야 오빠 매일 보고 싶지?"

 

 

 

 

"응! 꾸오빠 좋아"

 

 

 

 

"근데 오빠가 진희 매일 보려면 여기 있어야 되는데 아빠가 안된다고 하셔"

 

 

 

 

 

 

 

 

우는 시늉까지 해가면서 진희의 환심을 사려는게 딱 보여서 말리려던 석진의 입을 고사리같은 작은 손으로 막은 진희가 입을 열었다.
결국 두 손 두발 다 들은 석진이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나서야 이 사단이 끝이났다.

 

 

 

 

 

 

 

 

"아빠!"

 

 

 

 

"오빠는 진희랑 있고 싶은데"

 

 

 

 

"그러며 나빠"

 

 

 

 

"알겠어 대신 사고는 치지말고"

 

 

 

 

"아싸! 진희야 뽀뽀!"

 

 

 

 

 

 

 

 

 

 

 

 

 

 

 

 

 

 

 

 

 

 

 

 

 

 

 

 

 

 

예체능쪽이라 야자를 안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매일 같이 진희를 데려다주고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정국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한창 공부에 집념해야될 나이인데 정말 이래도 괜찮은걸까

 

 

 

 

 

 

 

 

"정국아"

 

 

 

 

"네 아저씨 진희는 방에서 자고 있어요"

 

 

 

 

"시험기간이니까 이번주는 여기 안오는게 좋을 것 같아"

 

 

 

 

"저 예체능 쪽이라 괜ㅊ..."

 

 

 

 

"아니 내가 안괜찮아 부모님이 걱정하실꺼야"

 

 

 

 

"그럼 진희는요?"

 

 

 

 

"2주동안은 부모님이 오시기로 했어"

 

 

 

 

 

 

 

 

갑작스런 말에 입을 꾹 다물어버린 정국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하루라도 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그와 가까이 있고 싶었던 마음이 석진에게는 짐이였을까
여태까지 자신 때문에 무리한 부탁을 승낙하고 진희를 돌보는 것도 빠듯한 와중에 자신까지 신경쓰느라 고생이였던 것은 아닐까

부정적인 생각들이 하나둘씩 자라나고 있었다.

 

 

 

 

 

 

 

 

"알았어요"

 

 

 

 

"저기 정국아"

 

 

 

 

"아니요 괜찮아요 귀찮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요 제가 애도 아니고"

 

 

 

 

"그런게 아니라 정국아"

 

 

 

 

"아저씨 진짜 바보야"

 

 

 

 

 

 

 

 

이런 상황이 올까봐 말을 아꼈던건데 단단히 오해한것 같아 머리가 복잡해졌다.
다섯살짜리 아이인 진희를 잘 돌본다고 해도 19살은 아직까지 어린 나이였다.
감정에 솔직한만큼 여리고 생각이 많고 자신이 내뱉은 말로 인해 상처를 입을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내뱉은 말을 주워담고 싶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고 정국이가 없다는 이유로 적막해진 집안이 어색했다.

 

 

 

 

 

 

 

 

 

 

 

 

 

 

 

 

 

 

 

 

 

 

 

 

 

 

 

 

 

 

기어코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오늘은 좀 더 늦을 것 같다는 전화를 집에 남기고 밀린 서류들을 정리하는 도중에 전화가 울렸다.
어느새 퇴근시간을 훌쩍 넘어버린 시간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전화를 받자마자 들고 있던 서류들을 내팽개치고 밖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진희가 열이 너무 나서 병원에 왔단다 애가 자꾸 아빠 찾는데 얼른 와'

 

 

한번도 이런적이 없었는데 부모님에게 맡겼다는 생각 하나로 너무 신경을 못 써준 자신의 탓이었다.
정국이도 없는데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걸까
아파도 말하지 않고 꾹 참고 있었을 딸 아이를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진희야!"

 

 

 

 

"일은 괜찮은겨?"

 

 

 

 

"일보단 진희가 중요해요 정말 죄송해요 어머니"

 

 

 

 

"니가 왜 죄송혀 그 싸가지 없는 가스나 때문이지"

 

 

 

 

"진희엄마 욕은 하지 마세요 애가 들어요"

 

 

 

 

"아빠?..."

 

 

 

 

"진희야 괜찮아? 아빠왔어 우리딸"

 

 

 

 

 

 

 

 

석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리는 진희를 꼭 안아주며 달래는 그의 손이 쉴새없이 떨리고 있었다.
아프다는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과 함께 떠오른건 정국의 얼굴이였다.
이럴때 어떡하면 좋지 정국아
그 아이라면 당황하지 않고 진희를 간호했겠지 아니, 애초에 아프게 할 일도 없었을꺼야

 

 

 

 

 

 

 

 

"진희야 미안해"

 

 

 

 

"아냐 아빠 진희 안아파"

 

 

 

 

"미안해"

 

 

 

 

 

 

 

 

진희가 잠에 들때까지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며 아이의 등을 쓸어내리던 석진이 긴장이 풀린건지 깊은 숨을 내뱉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도 잠든 진희를 꼭 끌어안고 다독이던 석진이 놀이터 그네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정국을 발견했다.

 

 

 

 

"어머니"

 

 

 

 

"왜 무슨 일이여"

 

 

 

 

"진희 데리고 먼저 들어가 계실래요?"

 

 

 

 

"왜그려"

 

 

 

 

"죄송해요 금방 올라갈게요"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어색했지만 애써 모르는척 하며 진희를 받아든 석진의 엄마가 발걸음을 돌렸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옆에 앉자고 생각한 것도 잠시 정국이를 발견할때부터 풀려버린 긴장 때문인지 몇 걸음 못가 자신의 다리에 걸려 넘어진 석진이였다.

 

 

 

 

 

 

 

 

"뭐야 누구야!"

 

 

 

 

"오랜만이네 정국아"

 

 

 

 

"아저씨?"

 

 

 

 

"그래 나야"

 

 

 

 

"더럽게 거기서 왜 그러고 있어요 일어나요"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이제보니 입술이 터져있는게 꼭 누군가한테 맞은것처럼 부어올라있었다.
말없이 정국을 바라보던 석진이 조심스럽게 입술 언저리를 손으로 쓸며 물었다.

 

 

 

 

 

 

 

 

"17대 1 뭐 그런 싸움이라도 했어?"

 

 

 

 

"그랬으면 제가 1이였겠지만 아니에요"

 

 

 

 

"그럼 왜 다쳤는지 물어봐도 될까?"

 

 

 

 

"그냥...애들이"

 

 

 

 

 

 

 

 

말할때까지는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 같은 석진의 눈빛에 체념한건지 무덤덤한 말투로 말을 꺼낸 정국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아저씨보고 뭐라 하잖아요"

 

 

 

 

"그래서 때린거야?"

 

 

 

 

"진희 엄마 얘기도 하고 막 그랬어요 한대만 더 때리고 올껄"

 

 

 

 

"네가 더 맞은건 아니지?"

 

 

 

 

"아니에요! 제가 더 때려줬어요 나이값 못하는 녀석들은 맞아도 싸죠"

 

 

 

 

 

 

 

 

진짜 여러모로 정이 많은 아이였다.
어찌보면 생판 남인 자신과 진희에 대한 얘기를 듣고 분을 참지 못하고 때렸다니 부어오른 뺨도 터져버린 입술도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구나
이번에는 있었으면 좋겠는데...주머니에 손을 넣어본 석진이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정국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입술 아프겠다 이리와봐"

 

 

 

 

"네? ㅇ...왜요 갑자기"

 

 

 

 

"약 발라줄게"

 

 

 

 

 

 

 

 

손에 들린 연고를 짜내 입술에 바르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흉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진희를 돌봐줬던 고마운 마음, 오늘 하루종일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던 너의 얼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황급히 손을 떼낸 석진이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눈을 꼭 감고 입술을 부딪혀오는 정국이였다.
몇분 같은 몇초가 흐르고 감았던 눈을 뜬 정국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저씨 입술 깨물었죠 피딱지가 있길래"

 

 

 

 

"ㅇ..아 그랬나?"

 

 

 

 

"좋아해요 아저씨 보고싶었어요"

 

 

 

 

 

 

 

 

순수한 그의 고백을 거절할만한 마음의 여유가 나에게는 없었다.
아니, 조금이라도 더 빨리 먼저 말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고 싶었다.

 

 

 

 

 

 

 

 

 

 

 

 

 

 

 

 

 

 

 

 

 

 

 

 

 

 

 

 

 

 

"아저씨 이거 받아요"

 

 

 

 

"이게 뭐야? 반찬?"

 

 

 

 

"엄마가 갖다주래요"

 

 

 

 

 

 

 

 

그렇게 연애를 시작한지 10개월쯤 됐을까 평탄할 줄만 알았던 둘 사이에 또 다른 위협이 가해지고 있었다.
아직 나와 정국이의 사이를 모르는 것 같은 정국이의 어머니가 요근래 들어 우리둘 사이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다.

 

 

 

 

 

 

 

 

"뭘 또 이렇게 많이 주셨어"

 

 

 

 

"진희가 너무 예뻐서 주는거래요"

 

 

 

 

"어머니가 여기 오는건 알고 있는거지?"

 

 

 

 

"네, 근데 저희가 애인 사이인건 몰라요"

 

 

 

 

 

 

 

 

알면 뒷목 잡고 쓰러지시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그저 해맑은 정국이의 볼을 몇번 두드려주고 다음번에는 인사라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석진이였다.
근데 그게 이렇게 빠르게 닥쳐올 줄은 몰랐지

 

 

 

 

 

 

 

 

"그러니까 네 말은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란 거야?"

 

 

 

 

"엄마 그게...아니 내 말 좀 들어봐 응?"

 

 

 

 

"어떻게...아니 석진씨 애도 있잖아요"

 

 

 

 

"네 그렇죠"

 

 

 

 

"나이도 28살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네...면목 없습니다"

 

 

 

 

"엄마 아저씨는 잘못한거 없어"

 

 

 

 

"조용히해 전정국"

 

 

 

 

 

 

 

 

반찬통을 가져다 주려는것까지는 좋은 시도였는데 집에 아무도 없을 거라는 정국이 말을 믿은게 화근이였다.
아니지, 안녕하세요 하고 우렁차게 인사를 해도 못들으셨던 어머니 잘못도...아니 그냥 내가 원인이다.
진희도 유치원에 있겠다 평일에는 좀처럼 쉬지 못하는 나와 학교 다니느라 바쁜 정국이가 오랜만에 휴일이 맞았던터라 신나게 대화도 하고 입도 맞대고

여러모로 꽁냥거리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방안에 계시던 정국이 어머니가 문을 열고 나오시면서 우리를 반겼다.
결국 들켜버린 관계에 몇 입이라도 할말이 없는 석진은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걸로 화낼 생각은 없어"

 

 

 

 

"네?"

 

 

 

 

"이렇게 번듯한 사위...아니, 그래 아들 하나 더 생긴다고 치자 근데 여태까지 엄마한테 말을 안한게 너무 속상하단거야 아들"

 

 

 

 

"ㅇ...엄마"

 

 

 

 

"말하기 힘들었겠지 그래도 엄마잖아 정국아"

 

 

 

 

"그럼 우리 계속 사귀어도 돼? 나 아저씨 만나도 돼?"

 

 

 

 

"석진씨 좋은 사람인거 내가 다 아는데 왜 반대하니 나쁜엄마 만들지마 무섭다 얘"

 

 

 

 

"감사합니다 어머님"

 

 

 

 

"아휴 왜 이렇게 굳어있어요 편하게 대해요"

 

 

 

 

 

 

 

 

며칠간 고민했던게 허무하게 날아가버리니까 좋기도 하고 뒤숭숭하기도 하고 크게 웃지 못하는 석진에 비해 엄마를 꼭 안으며 좋아하는 정국이였다.
석진의 집으로 가는 내내 손을 꼭 붙잡고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정국이를 보자 금방이라도 입을 맞추고 싶어진 그였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요?"

 

 

 

 

"2016년 마지막 날?"

 

 

 

 

"그럼 오늘 12시 지나면 무슨 날이게요"

 

 

 

 

"2017년"

 

 

 

 

"저 성인되는 날이죠 그리고 저희 부모님 여행가시는 날이에요"

 

 

 

 

"좋으시겠다 여행도 가고"

 

 

 

 

"아니 아저씨 그거 말구요"

 

 

 

 

"그럼...설마"

 

 

 

 

"저희 집에 아무도 없어요"

 

 

 

 

 

 

 

 

일부러 딱 붙어서 귓가에 속삭이는 발칙한 19살을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던 석진이 아까부터 잡아온 손에 깍지를 끼며 말했다.

 

 

 

 

 

 

 

 

"우리 통했네"

 

 

 

 

"네? 뭐가요?"

 

 

 

 

"진희 오늘 하루 부모님, 그러니까 할머니 댁에서 자고 올꺼야"

 

 

 

 

 

 

 

 

방금 정국이 했던 행동 그대로 귓가에 속삭인 다음 다급하게 집안으로 정국이를 끌어들인 석진이 현관문이 닫히자 마자 입을 맞췄다.
19살이라는 나이 때문에 찔리던 양심도 이제 훌훌 털어버릴 수 있겠다 진희도 아빠를 위해서 할머니집에 간다고 했겠다 더 이상 걸릴게 없는 석진이 정국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한번 더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 너무 늦게 말해서 미안해"

 

 

 

 

"뭐에요 갑자기"

 

 

 

 

"뭐에요 갑자기가 끝이야?"

 

 

 

 

"저도 사랑해요"

 

 

 

 

정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입술을 머금은 석진의 얼굴 한가득 웃음꽃이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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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부터 계속 쳐다보는게 느껴지는데 아닌 척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우스웠다.
집에서도 지겹게 보는데 학교에서도 저러고 싶을까
꼭 선물 받은 인형을 빼앗길까봐 두려워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손에 쥐고 꼭 놓지 않으려고 발악하는게 아버지를 빼다박아서 신물이 났다.
그런 녀석에게 적당히 맞춰주는게 내가 이 더러운 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였다.

 

 

 

 

 

 

 

 

"전정국"

 

 

 

 

"왜"

 

 

 

 

"내 필기 다했냐"

 

 

 

 

 

 

 

 

굳이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나란히 놓여진 공책 중 하나를 집어들어 건넸다.
유지하기 짝이없는 공책이 퍽이나 잘 어울렸다.

 

 

 

 

 

 

 

 

"오 꼼꼼해 역시"

 

 

 

 

"오늘 몇시에 집에가"

 

 

 

 

"뭐야 이제 나한테 관심이 좀 생겼어?"

 

 

 

 

 

 

 

 

해맑게 웃는 모습이 자기 딴에는 멋있다고 생각하는건지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껄끄러운 나에게는 그저 보고싶지 않은 얼굴일뿐이였다.

 

 

 

 

 

 

 

 

"대답이나 해"

 

 

 

 

"10시전에는 들어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뭐가 그리 불만인지 찡그려진 미간에 주름이 잡혀있었다.
7살때부터 지금까지 김태형과 한 집에 살고 있는 내가 아직까지도 적응하지 못하는것 중에 하나가 녀석의 이중성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바보같은 웃음을 흘렸던 사람이 맞나 싶을정도로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고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정국아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랫도리 간수 못하고 이리저리 박고 다니는 아버지 덕분에 우리집에서 떵떵거리면서 사는거잖아 너"

 

 

 

 

 

 

 

 

남들이 보기에는 가볍게 어깨동무를 한 우애깊은 장면이였겠지만 얹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자 어깨가 아려왔다.
직접 얘기해주지 않아도 알고있다.
더러운 피를 이어받게 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생판 얼굴도 본 적 없었던 아버지라는 사람 손에 끌려가다시피 도착한 곳이

지금 내가 사는 곳이자 김태형의 집이였다.
드라마 설정에서나 볼 법한 이복형제 그게 우리 둘이였다.
흰봉투를 받아들자마자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졌고 첫 날 집안에 발을 들였을때

지금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뺨을 때렸던 김태형 또한 몇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끓어오르던 분노를 참느라 그날 밤은 그렇게 밤새 숨죽여서 울음을 터트렸었다.
여전히 나를 더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다가도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에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어떻게 반응을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처럼 다리라도 벌리던가 도도하게 굴고 난리야"

 

 

 

 

 

 

 

 

엄마 얘기만 나오면 무언가가 걸린듯이 명치가 답답해졌다.
그냥 지금 당장이라도 녀석에게 달려들고 싶었지만 어차피 뒷상황은 뻔하기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김태형이 저러는거 한두번도 아니고

 

 

 

 

 

 

 

 

"아무튼 이따 밤에 보자"

 

 

 

 

 

 

 

 

밤에 보자는 말이 정말 얼굴만 보는 일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허리 좀 더 들어봐"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리는 녀석의 말이 들려왔지만 가뜩이나 힘겹게 지탱하고 있던 몸이 말을 들을리 없었다.
육두문자라도 내뱉고 싶은데 지금 입을 떼면 계집애처럼 소리를 지를 것 같아 안그래도 꽉 깨무는 통에 얼얼한 입안에 더욱 더 힘을 줬다.
시간이 꽤 흘러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중 또 다른 하나가 바로 이 행위 자체였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상대랑 무슨 재미로 관계를 가지려고 하는 것일까
언제부터 이런 짓을 했는지조차 흐릿할만큼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일방적인 폭력과 다름없는 이 행위가 녀석에게 무엇을 얻게 해주는지 알 수 없었다.
지배한다는 정복감을 갖기에는 이 악물고 버티는게 대부분이였고 반항만 하지 않을뿐 녀석과 같이 적극적으로 임한적도 없었다.

 

 

 

 

 

 

 

 

"전정국 딴생각 하지마"

 

 

 

 

 

 

 

 

아까보다 더 깊게 파고드는 녀석의 것에 고개를 묻으며 이불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저 이 시간이 얼른 지나가기를 바랄뿐이였다.
가끔 녀석을 올려다볼 수 있는 자세가 되면 정신없이 흔들리는 와중에 땀범벅이 된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져 있었다.
매번 할 때마다 아픈건 나인데 자신이 더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는걸 녀석을 알까
처음엔 호기심 두번째는 만족감 지금은 어떤 감정으로 나를 보고 있을지 알 것 같으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싶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씨발"

 

 

 

 

"담배 피지마 냄새나"

 

 

 

 

"전정국 많이컸다 그런소리도 하고"

 

 

 

 

 

 

 

 

늘 관계 후에는 담배를 피면서 뭐가 그리 맘에 들지 않는건지 욕을 뱉어댔다.
저녀석도 자신이 왜 나와 이러고 있는건지 알 수 없는건가
온몸이 아프고 매번 할때마다 이물감도 느껴지는게 속은 뒤집어질 것 같고 어머니도 저녀석 아버지랑 이런짓을 해서 나를 낳았겠지
울렁거림이 더 심해지자 참을 수 없는 토기가 밀려와 입을 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도착하는것까진 좋았는데 아픈허리 때문인지 거의 미끄러지다싶이 변기에 머리를 쳐박았다.
먹은것도 없는데 몇번이나 올라오는 위액을 다 토해내자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게 느껴졌다.

 

 

 

 

 

 

 

 

"너 왜그래 어디 아파?"

 

 

 

 

 

 

 

 

놀랐는지 커다래진 눈을 하고 내려다보는 김태형 표정이 어지간히 웃겼는지 작게 실소가 터졌다.

 

 

 

 

 

 

 

 

"더럽다"

 

 

 

 

"뭐가"

 

 

 

 

"너나 나나 내 어머니나 니네 아버지나"

 

 

 

 

 

 

 

 

평소같으면 화를 내면서 발악을 했을 김태형이 조용하다.
관계 시에 내비춰졌던 묘한 표정이 다시끔 얼굴 위로 떠오르더니 금새 사라졌다.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떼다 다시 다무는 녀석을 가만히 올려다보자 한참 눈을 맞추다 이내 고개를 돌려 망설임없이 방을 나섰다.

 

 

 

 

 

 

 

 

 

 

 

 

 

 

 

 

 

 

 

 

 

 

 

 

 

 

 

 

 

 

 

"네가 김태형이 그렇게 챙긴다는 애냐"

 

 

 

 

 

 

 

 

이래서 내가 김태형이랑 다른 학교를 가겠다고 몇번이나 말씀드렸던건데

태형이를 챙겨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굳이 같은 학교로 넣어버린 새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2년 내내 조용히 학교를 다닌것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될 정도로 사고를 치고 다니는 녀석이였고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려던 내 계획을 틀어지게 만들어버리기에 충분했다.

 

 

 

 

 

 

 

 

"김태형이랑 아무사이도 아닌데"

 

 

 

 

"웃기시네 매일 김태형이 말걸고 친하게 지내는것 같더만"

 

 

 

 

 

 

 

 

이녀석들은 김태형이랑 비슷한 부류인 것 같다.
몇번을 말해도 못알아쳐먹는다.
도대체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망상이 얼마나 크면 당사자가 얘기하는 말을 귓등으로도 안듣고 저러는걸까

 

 

 

 

 

 

 

 

"아니니까 좀 비켜"

 

 

 

 

 

 

 

 

가뜩이나 어제 무리했던 탓인지 몸도 안좋고 으슬으슬 추운게 몸살이라도 걸린것 같았다.
기분좋게 밥도 먹고 남은 점심시간을 어떻게 여유롭게 보낼까 생각중이였는데 이런 외진곳으로 알지도 못하는 무리들에게 끌려올 줄은 몰랐다.

 

 

 

 

 

 

 

 

"김태형이랑 사귄다는 소문도 있고 깔이라던데?"

 

 

 

 

"하긴 좀 반반하게 생겼다"

 

 

 

 

"남자랑 하면 좋냐?"

 

 

 

 

"내가 어떻게 알아 미친놈아"

 

 

 

 

 

 

 

 

면전에 대고 저딴 말을 들으니까 점점 참을성이 바닥을 치고 있었고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저속한 언어를 써가면서 히히덕 대는 녀석들을 무시하고 걸음을 떼려는데 한 녀석이 팔을 뻗어 머리채를 쥐어잡았다.

 

 

 

 

 

 

 

 

"아 시발"

 

 

 

 

"와 욕도 하네? 갑자기 막 불타오른다"

 

 

 

 

"김태형한테 대주고 다닐꺼면 우리한테도 대줘"

 

 

 

 

 

 

 

 

김태형이랑 그런 짓을 하는건 맞지만 그건 원해서 하는 일도 아니고 어쩌다 그런 소문이 퍼지게 된 건지 영문을 모르겠는 상황에 기분만 더 더러워졌다.
말하고 다니는건 아니겠지 그런거라면 얹혀사는 입장이건 뭐건 죽도록 패줘야겠단 생각을 곱씹고 있을때 벽으로 거칠게 몸이 밀쳐졌다.

 

 

 

 

 

 

 

 

"오빠가 예뻐해줄테니까 걱정마"

 

 

 

 

"꺼져 미친놈아 얼굴도 좆같이 생겨가지고"

 

 

 

 

 

 

 

 

아까 잡혔던 머리부분이 아려오고 벽으로 밀쳐지면서 어깨를 부딪힌 탓에 식은땀이 흐르는게 느껴졌다.
거기다 상대는 여려명인 탓에 제대로 힘을 쓸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몇 대 맞으면 입 좀 다물겠지"

 

 

 

 

 

 

 

 

그 말을 끝으로 몇명이 정국을 향해 달려들었고 어설프지만 꽤 힘이 들어간 주먹을 날렸다.
차라리 김태형한테 쳐맞는게 더 낫겠다.
몇 번 맞으면 끝날만한 일을 여러명이 밟고 차고 난리도 아니였다.
터진 입술에 피딱지가 앉은지 오래였고 여름이라 새하얀 하복에는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주저앉은 몸을 반쯤 일으키더니 교복 단추를 풀어오는 손길에 입안에 고인 피를 녀석의 얼굴에 뱉어냈다.

 

 

 

 

 

 

 

 

"아 시발!"

 

 

 

 

"이렇게 쳐맞고도 정신을 못차렸네 야 다들 잡아"

 

 

 

 

 

 

 

 

각각 팔이며 다리며 잡아오는 손길이 소름끼치다못해 더러웠다.
김태형이나 이녀석들이나 같은 남자한테 발정하는것부터가 정상이 아닌거고 이렇게 때려눕혀서라도 하고 싶을까
무엇보다 김태형이랑 연관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이런 수모를 겪어야하는것 자체가 억울하다 못해 미칠지경이였다.

 

 

 

 

 

 

 

 

"재미좋다 너네들 뭐하냐"

 

 

 

 

"어떤 새끼가 지랄이ㅇ...김태형?"

 

 

 

 

 

 

 

 

거의 체념한 상태로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중학교때 옆반 녀석과 시비가 붙어 주먹이 오갔을때 터진 입술을 보고 지었던 표정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눈앞에 서 있는 김태형이였다.
험악하게 굳어진 얼굴로 정국의 바지버클을 풀어내던 녀석을 힘껏 차버리더니 팔다리를 잡고 있던 나머지 녀석들도 가볍게 걷어차버렸고

그럼에도 성이 안풀리는건지 몇번이나 밟고 짓이기고 보는 내가 다 아플정도록 미친듯이 녀석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었다.

 

 

 

 

 

 

 

 

"김태형 그만해"

 

 

 

 

"..."

 

 

 

 

"그만하라고 그러다가 죽겠어"

 

 

 

 

"죽으라고 그러지 뭐"

 

 

 

 

 

 

 

 

아이처럼 삐죽거리며 대답을 하고는 기절한 녀석의 얼굴에 신발자국을 남기며 즈려밟더니 천천히 정국에게로 걸어갔다.
벌어진 옷가지를 추스리려는 정국의 손길을 저지하고는 자신이 직접 단추를 잠궈준 후에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보는 태형이였다.

 

 

 

 

 

 

 

 

"진짜 죽여버릴까"

 

 

 

 

"너도 똑같아"

 

 

 

 

"뭐가"

 

 

 

 

"저새끼들이 하려던 짓 너도 자주 하잖아"

 

 

 

 

"아니 그건...시발"

 

 

 

 

 

 

 

 

맞는말이라서 뭐라 더 말은 못하고 인상을 구기던 녀석이 옆에 붙어앉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도 보기 싫은 녀석이었는데 아까 몹쓸짓거리를 당하는 내내 김태형 생각만 했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 같이 한숨을 내쉬는 정국이였다.
얼른 집에가서 더러운 교복도 빨고 다친곳도 치료하고 푹신한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조용히 서로의 숨소리를 듣고 있는 이 시간을 깨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왜 그렇게 서로를 싫어하게 된 건지 왜 김태형과 내가 관계를 맺고 싶어하게 된 건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였지만

그 이유가 서로의 존재 자체만은 아니라는 것 하나는 녀석도 나도 알 수 있는 사실이였다.
어머니가 다르고 아버지가 같은 이러한 관계 속에 놓이지만 않았어도 나름 잘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야 전정국"

 

 

 

 

"..."

 

 

 

 

"전정국"

 

 

 

 

"왜"

 

 

 

 

"정국아"

 

 

 

 

"왜 자꾸 부르는데"

 

 

 

 

"좋아해, 아까 그 새끼 진짜 죽일뻔 했어"

 

 

 

 

 

 

 

 

이제 좀 생각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드디어 결론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간 녀석이 나를 소유하고 싶어하고 빼앗길까봐 불안해 했던 이유에 관한 해답을 녀석에게 듣는 순간이였다.
모진 말을 써가면서까지 나한테 관심을 받고 싶어했던 것을 보니 정말 생각까지 어린놈이였다.
더불어 김태형이 굳이 나와 관계를 맺는 것도 내가 완강히 거절하지 않았던 것도 확실해졌다.
더러운게 아니라 좋아하는 거였네

 

 

 

 

 

 

 

 

"어차피 아버지만 같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첫 날 내 뺨을 내리쳤던 이유가 단순히 아버지를 빼앗겼다는 사실에서 나온 행동이라면 모든 것이 설명 가능했다.
김태형에게 나는 갑자기 들이닥친 외부인과도 같았으며

자신이 누리던 모든것들을 억지로 나눠줘야할 대상이 되었으니 그렇게 죽도록 미워할 수 밖에 없었던것이였다.
아마 김태형에게 미움을 받으면서 나도 녀석을 싫어하게 된 것 같았다.
싫어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 즉 애증을 느끼던 녀석이 선택한건 낯간지럽게도 사랑이였다.

 

 

 

 

 

 

 

 

"난 너 좋다고 안했는데"

 

 

 

 

"좋아하게 만들면 되는거지 자 일어나 집에 가자"

 

 

 

 

 

 

 

 

막무가내인건 여전한건지 내밀어 오는 손을 앞에두고 망설이던 정국이 마지못해 마주잡고 몸을 일으켰다.
역시 김태형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관계로든 녀석과는 마주쳤을 운명이라는 생각을 하며 한발치 앞서 걷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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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을 받은지 오늘부로 딱 일주일째였다.

 

 

 

 

 

 

 

 

"하...언제까지 이래야 되는걸까"

 

 

 

 

"뭘 언제까지 그래요"

 

 

 

 

 

 

 

 

그날부터 정국이를 피해다녔다.
싫다거나 역겹다거나 그런게 아니라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였다.
시도때도 없이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도 모르는 새에 정국이의 입술을 생각하고 있었다.
같이 밥을 먹는 친구 녀석들도 내가 요즘 이상하게 멍하다고 뭔 일 있냐고 물어볼 정도로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였다.
어떻게든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에 제일 먼저 생각해낸게 녀석과 거리를 두고 마주치지 않는 것이였다.
유난히 많던 잠도 줄이고 일부러 더 바깥으로 나돌고 했던 노력이 무색하게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것은 이 모든 일의 원인인 전정국이였다.

 

 

 

 

 

 

 

 

"나 피해다니느라 고생 좀 했겠네"

 

 

 

 

"티났어?"

 

 

 

 

"내가 무슨 형이에요? 바보도 아니고 당연히 알죠"

 

 

 

 

 

 

 

 

이유가 어찌되었든간에 사람을 일부러 피해다녔고 상대방은 그걸 알고있었던 상황이라면 태형 본인이 백번 잘못한게 맞으니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하고 바닥만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였다.

 

 

 

 

 

 

 

 

"태형이형"

 

 

 

 

"응 정국아"

 

 

 

 

"형"

 

 

 

 

"응 왜불러"

 

 

 

 

 

 

 

 

"나 바닥에 있는게 아니라 형 앞에 있는데요"

 

 

 

 

 

 

 

 

예전처럼 해맑게 웃으며 눈을 맞추고 대답을 해주지도 않고 아까부터 죄인처럼 바닥만 쳐다보는 태형이 못마땅해진 정국이였다.
오히려 태형과의 사이를 어색하고 불편하게 만들어버린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나 좀 똑바로 봐줘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자 일주일만에 보는 정국이의 모습이 시야에 가득 찼다.
입을 맞췄던 그 날과 묘하게 겹쳐지는 얼굴에 밤새 저를 괴롭혔던 들뜬 기분이 다시끔 밀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평소처럼 대해달라고 말했잖아요 물론 힘든거 알아요 근데 고백한건 난데 왜 형이 피해다녀요 피해다녀도 내가 피해다녀야지"

 

 

 

 

 

 

 

 

살짝 찡그려진 미간과 몇 번 깜빡여지는 눈에 의해 드러나는 속눈썹이 보였고

곧게 뻗은 콧대를 지나 반복적으로 쉴새없이 움직여지는 입술에 시선이 멈췄다.

 

 

 

 

 

 

 

 

"형 맘 잘 알았으니까 이제 내가 형 눈 앞에서 안보이면 되잖ㅇ..."

 

 

 

 

 

 

 

 

몸이 이끄는대로 손을 올려 어깨를 잡아 끌어당기고는 입술을 머금었다.
놀라서 굳어진 몸을 달래듯이 살살 입술주변을 쓸어내리던 혀가 살짝 깨물자 벌어진 틈새 사이로 밀려 들어갔고

입안 곳곳을 휘젓더니 입천장을 간질이며 깊숙히 파고들었다.

 

 

 

 

 

 

 

 

"뭐야 너네 집앞에서 야동 찍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정신이 번쩍 들면서 두 눈이 떠졌다.
눈을 뜨자 코앞에 보이는 놀란 눈을 하고 있는 정국이의 얼굴과 맞닿아있는 입술의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몇 발자국 떨어졌다.

 

 

 

 

 

 

 

 

"꾹아! 그러니까 이게 어! 그러니까 말야!"

 

 

 

 

"형..."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게 일주일전과 똑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정국이한테 키스를 한거잖아
나한테 고백한 전정국한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체할 수 없을만큼 달아오르는 기분에 붉게 물들어버린 얼굴을 한 태형이 재빠르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버렸다.

 

 

 

 

 

 

 

 

"이야 전정국 두번째 차인거야?"

 

 

 

 

 

 

 

 

놀리는게 명백한 말투로 내뱉은 윤기의 말이 끝나자마자 현관문이 반쯤 다시 열렸다.

 

 

 

 

 

 

 

 

"그...정국아 일단 미안하고 어...음 그러니까 내일 시간 좀 내줘 알겠지? 끝나고 바로 전화할게"

 

 

 

 

 

 

 

 

자기 할말만 하고 다시 굳게 닫혀버린 현관문을 쳐다보던 정국이 윤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윤기형"

 

 

 

 

"왜, 또 차여서 사고 쳤다고?"

 

 

 

 

"김태형 키스 엄청 잘해요"

 

 

 

 

"좀 곱게 미쳐라 임마"

 

 

 

 

"그리고 이번에는 제가 사고친거 아니에요 태형이형이 쳤어요"

 

 

 

 

 

 

 

 

좋아하는 녀석이랑 키스 두번 하더니 드디어 맛이 간 것 같다는 말을 하며 정국이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윤기였다.

 

 

 

 

 

 

 

 

"늦었어 얼른 들어가 추워 죽겠구만"

 

 

 

 

"저 태형이형이랑 잘 되면 형한테 빨간 컨버스 하이 사줄게요"

 

 

 

 

"꺼져 조던넘버스 아니면 안받는다"

 

 

 

 

 

 

 

 

역시 정국이를 계속 피해다녔어야 하는게 맞았다.
그저 옆집 동생일뿐이였는데 어쩌다 키스까지 하게 된걸까
일주일동안 만나지 않으려 했던 정국이와 마주친 순간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이게 정말 사랑인지 오랜만에 하는 키스에 의한 본능 때문이였는지

딱 무엇이다 결론 내릴 수 없는 감정에 이 날도 태형은 뜯 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 했고 선택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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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해지자

 

 

 

 

W.닻별

 

 

 

 

 

 

 

 

 

 

 

 

 

 

 

 

 

 

 

 

 

 

 

 

 

 

 

 

 

언제 말하지
속에서는 이미 몇번이고 말을 건네고 그 후에 상황까지 다 그려놨는데 쉽사리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않는 말에 눈치만 살피고 있는 정국이였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윤기의 모습이 자신의 앞을 스쳐지나가 복도 끝을 향해 사라질 때까지 결국 말 한마디 건네보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난 정국이

눈앞에 놓인 아무 잘못도 없는 자판기를 걷어찼다.
꽤 힘을 주고 찬 탓인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음료수가 뽑아져 나왔다.
평소라면 왠 떡인가 싶어 바로 집어들어 마셨겠지만 공짜 음료수만으로는 지금의 자신을 위로하기에는 역부족이였다.
알고 지낸지 1년 짝사랑한지 2년 이제 곧 졸업인 윤기의 얼굴을 얼마나 더 오래 볼 수 있을지 가늠할 수도 없을만큼 막막한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번에도 실패했어?"

 

 

 

 

"조용히 해라 죽겠으니까"

 

 

 

 

 

 

 

 

같은과 동기 녀석의 말을 듣자마자 아침에 겪었던 일이 되살아나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 알고지낸만큼 내 표정만 봐도 뭐가 어떤지 척 하면 아는 녀석의 태도가 오늘만큼은 달갑지 않았다.

 

 

 

 

 

 

 

 

"너 그러다가 말도 못붙이고 평생 만나지도 못한다 실습 나가서 취직하는 경우도 많잖아"

 

 

 

 

 

 

 

 

애써 부정하고 싶었지만 백번 천번 맞는 말이였다.
같은과 같은동아리 선후배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
윤기와의 접점을 수치로 표현하자면 10%? 아니 5% 도 높게 쳐줬다고 볼 수 있을만큼 서로간의 교류가 없었다.
평소 친구녀석들에게 대담하다 패기넘치다 이런 소리를 들어온 전정국이 짝사랑 하나 때문에 3일도 아니고 3년을 끙끙 앓고 있다니

 

 

 

 

 

 

 

 

"3년동안 뭐했냐"

 

 

 

 

"조용히해"

 

 

 

 

 

 

 

 

유일하게 자신의 속사정을 알고 있는 녀석인데 이해해주지는 못할망정 속만 박박 긁어대니 서러움이 밀려왔다.
엎드린 채로 신세한탄을 하고 있었는데 툭 하고 어깨를 건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만해 놀 기분 아니라고"

 

 

 

 

 

 

 

 

그만하라고 말했는데도 계속 건드리는 손에 고개를 쳐들고 언성을 높였다.

 

 

 

 

 

 

 

 

"그만하라고 했잖ㅇ..."

 

 

 

 

 

 

 

 

당연히 옆에 앉아있던 녀석이 장난을 친거라 생각했는데 눈앞에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인 윤기의 얼굴이 자리잡고 있었다.
너무 좋아해서 환각까지 보이나싶어 뺨을 치고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는 정국의 모습을 지켜보던 윤기가 실소를 터트리더니

손을 잡아끌어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떨어트린것 같아서"

 

 

 

 

"아..."

 

 

 

 

 

 

 

 

그제서야 자신의 손에 놓인 학생증을 발견하고 한참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다음부턴 잘 챙기고 다녀"

 

 

 

 

 

 

 

 

심드렁한 표정으로 정국이를 쳐다보던 윤기가 이내 발걸음을 돌려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살아있냐"

 

 

 

 

"아니 딱 죽기직전이야"

 

 

 

 

 

 

 

 

멍청하게 학생증을 흘린 자신에게 감사해야될지 그걸 또 찾으러 와준 윤기한테 감사해야할지

뭐가 됐던 아까의 안좋던 일들은 싹 다 잊어버린듯이 기분이 나아졌다.
입학식 때 이후로 두번째 하는 대화였다.
입학식 날 길을 잃어버린 자신에게 툴툴 거리기는 했지만 직접 장소까지 데려다 준 무심한 듯 다정한 모습을 보고 좋아하게 됐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와 별반 다를거 없이 주고받은건 몇마디뿐이였지만 3년동안 마음고생 했던 자신에게 윤기의 시선 말 무엇하나 간절하지 않은게 없었다.
감사하다고 말하고 밥 한번 살게요라는 말을 덧붙여서 같이 밥 먹을 기회나 만들걸 이제와서 이런 좋은 생각을 떠올려봤자

이미 윤기는 사라진지 오래였고 답답함에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목이 마를때마다 매점보다는 자판기를 이용해야 마음이 편하다는 자신만의 논리로 늘 같은 자리에 놓여있는 자판기로 가 습관적으로 음료수를 뽑았다.
이제 공짜음료수를 먹는 방법을 알았으니까 돈 좀 굳겠다싶은 마음으로 힘껏 자판기를 걷어찼다.

 

 

 

 

 

 

 

 

"아씨..."

 

 

 

 

 

 

 

 

아침에는 운이 좋았던건지 발끝만 아려오고 정작 음료수는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달칵하고 동전이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길래 구부렸던 몸을 피자마자 볼 옆에 시원하다못해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음료수 사먹을 돈도 없냐"

 

 

 

 

 

 

 

 

하루에 두번이나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친다는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아무때나 툭 튀어나와서 놀래키는건 둘째치고 햇살이 눈이 부신 탓인지 찡그린 미간까지도 조용히 뛰고 있던 심박수를 올리기에 충분했다.

 

 

 

 

 

 

 

 

"아니 아까는 나왔는데 이게 막 안되더라구요"

 

 

 

 

"그냥 이거 마셔"

 

 

 

 

 

 

 

 

볼에 가져다댄게 저거였구나
두손으로 받아든 음료수는 자기가 매일 뽑아먹는것과 같은거였다.

 

 

 

 

 

 

 

 

"선배도 이거 좋아해요?"

 

 

 

 

"그게 제일 맛있으니까"

 

 

 

 

"역시 이게 짱이죠 진짜 맛있어요 처음에 먹자마자 와 이런맛도 있구나 하고 신세계를 발견한 줄 알았..다니까요"

 

 

 

 

 

 

 

 

신나서 혼자 떠들다가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윤기와 눈이 마주쳤다.
갈피를 못잡고 흔들리던 눈동자가 이내 바닥을 향했다.

 

 

 

 

 

 

 

 

"매일 이거 사먹는것 같던데 많이 좋아하나봐"

 

 

 

 

"그럼요 맛있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올 정도로? 1년동안 계속 그랬던것 같은데"

 

 

 

 

"진짜 일 없으면 매일 여기 올정도라서요 근데 어떻게 알았어요?"

 

 

 

 

 

 

 

 

1년동안이라는 말이 나오자 정국이 놀란표정으로 윤기를 향해 물었고 약간의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얼굴로 정국의 시선을 피하는 윤기였다.
한동안의 정적을 깨고 긴 한숨을 내쉬던 윤기가 낮은 목소리로 잠깐 얘기 좀 하자며 그늘진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늘진 벤치로 장소를 옮겨도 아까와 같은 정적이 계속 되자 괜히 긴장이 되는지

윤기가 건네 준 음료수만 홀짝이고 있는 정국이를 빤히 쳐다보다 정면을 응시하며 말을 꺼냈다.

 

 

 

 

 

 

 

 

"좀 뜬금없지만 실습 나간 곳에서 정직원으로 채용하고 싶다고 하더라"

 

 

 

 

"아..그래요? 축하해요"

 

 

 

 

 

 

 

 

말이 씨가 된다는 옛날 속담처럼 되어버린 상황에 씁쓸하게 웃으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만 울적해지는 마음에 어깨가 눈에 띄게 축 쳐졌다.

 

 

 

 

 

 

 

 

"아마 다음주부터는 학교 안나오고 일하러 갈 것 같아"

 

 

 

 

 

 

 

 

굳이 따로 얘기해서 전할만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없는 정국이였다.
혹시 자신을 좋아한다는걸 알아채서 그만 좋아하라고 선이라도 긋는게 아닐까
행여나 그런거라면 이런식으로 돌려말할게 아니라 직접적으로 얘기를 듣는게 상처가 덜하겠지만

어찌되었든 시작도 못해본 첫사랑이 끝맺음을 맺는다는 슬픈 사실은 변함없는 것이였다.

 

 

 

 

 

 

 

 

"그래서 말인데 마지막으로 하는 얘기니까 들어"

 

 

 

 

"...네?"

 

 

 

 

 

 

 

 

사뭇 진지한 표정을 띈 윤기의 얼굴을 마주하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왜인지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말을 꺼내기가 힘든건지 뜸을 들이는 윤기에 의해 실컷 윤기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던 정국이 헛기침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렸다.

 

 

 

 

 

 

 

 

"번호 좀 알려줘 연락하고 싶어"

 

 

 

 

"...? 뭐라구요?"

 

 

 

 

"싫으면 싫다고 해"

 

 

 

 

"아니 제 번호 알려달라고 한거죠?"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웃으면 안되는데 저절로 지어지는 미소에 재빨리 윤기 손에 들린 폰을 가져가 번호를 찍고는

자신의 번호로 전화를 해 윤기의 번호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고 착실히 해냈다.
그동안의 짝사랑을 가엽게라도 여긴건지 오늘따라 운수가 좋은게 몽글몽글한 느낌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이제 강의 시작하니까 가봐야겠다"

 

 

 

 

"아 들어가보세요 음료수 잘 먹었어요"

 

 

 

 

"아 그리고 오해할까봐 말해주는데"

 

 

 

 

"네?"

 

 

 

 

"이거 너한테 작업거는거야"

 

 

 

 

 

 

 

 

몸을 일으켜 물끄러미 정국을 바라보고 있던 윤기가 작게 속삭이고 폰을 가리키더니 뒤도 안돌아보고 빠르게 걸어가버렸다.
들고있던 빈캔을 떨어트린 정국이 얼굴을 감싸쥐고 고개를 숙였다.

 

 

 

 

 

 

 

 

"미쳤어 진짜 미친거야"

 

 

 

 

 

 

 

 

윤기가 뱉은 말을 곱씹어보자 다시 붉어진 얼굴에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정국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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